풋풋한 계절의 전령사, 냉이 예찬
이유 없이 몸이 나른하고
오후만 되면 꾸벅꾸벅 쏟아지는 졸음으로 힘든 요즘이다.
입맛도 없고 만사가 귀찮은 듯 마냥 드러눕고만 싶다.
개중에는 나이 탓이라 가볍게 치부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모든 증상이 몸으로 봄을 맞아들이기 위한 자연스런 신호들로 이해하고 싶다.
봄이면 우리 몸은 고갈된 원기 회복에 필요한 비타민을 필요로 한다.
따뜻한 기온 상승으로 체온이 올라가는 것을 막으려고
피부 혈관이 확장되어 혈액이 피부로 몰리게 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내장의 혈액 순환이 약해지고 소화액 분비가 떨어져
입맛이 없게 되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한다.
이 때 섭취해야 하는 음식이 바로 비타민이 풍부하게 들어있는 봄나물이다.
간의 활동을 도와 피로를 이기게 해주는 많은 종류의 봄나물.
나는 그 중에서도 냉이를 가장 좋아한다.
풋풋하고 상큼한 향기의 냉이 맛이 온 몸으로 전해지는 순간
생기를 잃어가던 온 몸의 세포가 일시에 확 깨어나는 느낌이다.
나른해진 몸을 조이고 기름을 치는 데 이 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나생이, 나승구, 나잉게, 계심채, 정장채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제채(薺菜)로 쓰는 냉이.
채소 중 단백질 함량이 가장 많고 칼슘, 철분, 비타민 A와 C 또한 충분한 나물이다.
알칼리성 식품으로 오래 전부터 식용과 약용으로 사용되어 온,
우리 서민에겐 더할 수 없이 친숙한 이름이기도 하다.
냉이 특유의 아린 듯 향긋한 향에서
어린 시절 가슴 설레며 바라보던 연모의 대상이 떠오른다.
끓일 때 나는 그 구수한 냄새는 늘 넉넉한 치마폭 같은
어머님의 그리운 체취를 떠올리게도 한다.
어릴 적 남동생은 반찬 투정이 심했다.
잔뜩 시어버린 김장김치가 자꾸만 올라오는 밥상 앞에서
동생의 밥 숟가락질이 더디어 졌다 싶으면 어머님은 우리들을 채근해 들로 내몰았다.
해야할 숙제가 태산이라는 둥 봄바람에 얼굴이 까맣게 타서 싫다는 둥
별별 실랑이가 오고 가지만 결국은 아들의 입맛을 향한
어머님의 은근한 사랑이 승리를 했다.
있는 대로 입이 튀어나오던 우리들이지만 그것도 잠시,
곧 들판에 쏟아지는 햇살과 깔깔거리는 웃음으로 버무려진
봄의 교향악이 아름답게 펼쳐지곤 했다.
냉이를 캘 때는 뿌리가 잘라져 나가지 않게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냉이를 약간 비켜서 조심스럽게 호미를 땅속으로 밀어 넣어
단번에 들어올리듯 힘을 주어야 온전한 뿌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런 행위를 거듭하면서 흙 냄새가 가져다 주는 순순한 마음의 정화와
추운 겨울을 이겨낸 작은 생명체의 강인함을 은연중에 배웠던 들판.
그 들판에서부터 우리의 봄은 조금씩 뿌리를 뻗고 뻗어
희망의 시간들을, 사람들을, 세상을 이끌었던 건 아닌가 싶다.
냉이가 식탁 위에 오르기까진
손질하는 하나하나의 과정에 정성이 많이 들어가야 한다. 뿌
리의 흙이며 잎의 잔손질까지 일일이 다듬어서 해야 하므로 시간도 많이 든다.
하지만 먹어 주는 사람이 절로 감탄하는 기꺼운 맛의 표현으로
수고한 이는 행복감의 보상을 받게 된다.
멸치와 다시마로 국물을 우려내서 된장을 푼 물에
냉이를 넣고 조개를 곁들여 끓여낸 냉이국의 시원한 맛.
강 된장에 두부와 냉이, 고추를 넣고 보글보글 끓여낸 냉이 된장찌개.
소금 넣고 살짝 데친 냉이를 고추장과 마늘, 식초, 설탕, 참기름을 살짝 넣어
조물조물 무친 냉이 초고추장 무침.
알맞은 크기로 자른 냉이에 부추, 달래, 맛살, 부침가루 등을 섞어
노릇노릇하게 지져낸 만점 영양 간식이기도 한 냉이 부침전.
허약한 사람에게 최고의 영양 공급원인 냉이죽,
아삭아삭하게 살짝 튀긴 튀김...등등
냉이로 할 수 있는 요리를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무슨 잔치를 하는 것도 아닌데 온 집안에 동동 떠다니는 들뜬 기운과
잠잠한 위장을 사정없이 공격하는 유혹적인 냄새로 입안 가득 침이 고이게 하던 무엇.
저녁 밥짓는 부뚜막에 오도마니 지키고 앉아
오랜만에 입맛 다시며 밥상을 기다리던 남동생의 반짝이던 눈망울.
어머니의 눈길이 동생의 바쁜 밥숟가락 위에 흡족한 미소로 얹히면
봄볕에 발그레한 볼이 되었던 우리들은 절로 어깨가 으쓱거려졌다.
시원한 냉이국 국물로 먼저 입 속을 적셔 놓고
뜨거운 밥 위에 된장찌개를 올려 슥슥 비벼먹고
냉이 무침으로 새콤달콤한 봄을 음미하다 보면
입 맛 없다는 소릴 언제 했던가 싶게 밥 한 그릇은 어느새 뚝딱이다.
잊은 듯이 살다가도 어느 순간 허기가 밀려들 듯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입맛 또한 그러한가 보다.
자신도 모르게 바싹 다가가고 싶고 다시 찾게 되는 음식들.
그것은 피해갈 수 없는 자기 자신의 본능이자
나이들 수록 찾게 되는 소중한 기억에 대한 애착 때문은 아닐까.
모처럼 밥그릇을 소리나게 싹싹 긁어 비워내는 자식들을 찬찬하게 둘러보며
어머님 얼굴에 그려졌던 그 흡족한 미소가 새삼스레 그리워진다.
내일 저녁엔 나도 그 옛날 어머님이 해주시던
그 맛은 아닐지라도 비슷하게 흉내낸 밥상을 차려야겠다.
어쩌면 그 밥상 앞에서 식구들의 맛 평에 앞서 내 목젖이 뻐근해 올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