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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순이


BY 개망초꽃 2006-02-10

임신을 하기 전부터 결정을 하고 기다렸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만 인연이 닿아 있는 게 아니고, 사람과 사이에만 이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전혀 남모를 사람끼리 만나 같은 느낌을 갖고, 감정이 통하고 미워하고 이별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사람과 사람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멀건이와 이별을 하고, 그게 죽어서 이별을 한 게 아니고 살아서 생이별을 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생생하다. 멀건이와의 추억과 이별이 생생이 살아 팔팔뛰고 있었다. 그게 한 마리 동물이었지만 우리에겐 동물 이상을 뛰어 넘어 살아 있는 생명과 생명이 만난 인연이고 느낌이고 팔팔한 감정이었다.


사랑을 잃으면 다른 사랑만이 그 상처를 치유해준다고 했듯이, 한 마리 생명을 잊어버리려면 다른 생명을 품에 안아야 치료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형편상 그러질 못했다. 그러다가 적절한 시기에 다다라 마침 친구와 개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가 갈색푸들을 말했고, 나는 다시 개를 기른다면 갈색푸들을 기르고 싶었고, 아주 딱딱 맞아 떨어져서 친구가 기르고 있던 개가 임신도 하지 않았는데 임신을 하면 무조건 나에게 주겠다고 받겠다고 서로 약속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부터 기다렸다. 그리고 임신소식을 듣고,  여동생이 임신한 것처럼 기뻤고, 세상에 태어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세상에 태어나던 날은 하늘이 높았나? 그건 그 시간에 하늘을 못 봐서 모르겠고, 집이 울리도록 우리 식구들은 기뻐 소리를 높였다. 애기가 태어났데, 건강하데, 여자란다, 하하하.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때부터 이름을 짓기 시작했다. 개울이,편지,갈푸,종윤아,달비,꽃순이 맨 처음엔 개울이가 유력했었는데 시간이 흘러 봄이 가깝다 보니 꽃순이로 결정이 났었다. 근데 거기서 파상된 것이 꽃님이도 괜찮지? 꽃눈이는 어때? 남자라면 꽃돌이가 좋겠다, 했었다. 드디어 강아지가 오기 며칠 전에, 정신에 맛이간 이름 같은데, 순수해 보이긴 해, 꽃처럼 예쁘잖아, 엄마 별명이기도 하거든, 그래 좋다, 꽃순이로 마무리를 짓고, 꽃순이를 기다렸다.


차 앞자리 잠바에 싸여서 자고 있던 꽃순이는 크레파스의 고동색, 바로 그 고동색이었다. 한 털도 다른 색이 섞이지 않은 크레파스 고동색, 나무를 그리고 나무기둥과 나무줄기를 칠하던 나무 색, 집을 그리면 집 중앙에 그리던 문에 칠하던 문 색이었다.


꽃순이가 오던 날부터 우리 식구들은 꽃순이의 몸종이 되어 꽃순이가 움직이는 대로 눈을 떼지 못하고, 꽃순이가 뭔짓을 하면 그 짓에 감동하고 힘을 주고 안심을 하고 크게 웃어댔다.


눈이 빠끔하니 초롱거린다. 얼굴을 파묻고 자면 털실뭉치같다. 목에 두르면 털목도리가 된다. 손짓 하나 발짓 하나 살아있는 인형이다. 이빨로 손을 잘근잘근 아프게 깨문다. 팔닥팔닥 뛰어다니기도 하고, 와릉와릉 짓기도 한다.


두달된 애기라서 자다가 팔딱 일어나 뛰어 놀다가도 금방 털 뭉치가 되어 잠이 든다. 똥도 자주 누고 오줌도 자주자주 눈다. 똥을 눕느라고 끙 하고 힘을 주면 우리도 같이 힘이 들어간다. 눌 만큼 누면 시원하겠다, 하고 한 방울만 떨어뜨리면 더 눠야 하는데 하면서 덜 시원한 듯 찜찜하다. 하루에 수시로 용변을 본다. 애기들도 기저귀마다 똥을 묻히듯이 개도 어리면 조금씩 자주 그러나보다.


친정엄마가 꽃순이를 보러 오셨다. 꽃순이라고? 마른 장미꽃 같네, 땅바닥에 구르는 낙엽 같다, 하셔서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다. 꽃순이라는 이름을 닮아 우리 집은 웃음꽃이 화닥화닥 피어났다.


찻상을 펴면 꽃순이 발이 먼저 올라온다. 발을 치우면 다시 입이 올라와 손을 깨물 듯이 나무 상을 깨물어 먹는다. 나무에 이빨자국 나는 소리가 난다. 주둥이를 살짝 때려줬더니 입술을 실룩거리며 뒤로 물러나 앉더니 찻상에 오질 않는다. 어려도 눈치가 빠르다.


사람만 졸졸 따라다닌다. 다른 사람이 나가면 울지 않는데, 상윤이가 나가면 현관 앞에 앉아 잉잉거린다. 벌써 식구 중에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결정이 된 것 같다. 암놈이라서 아들인 상윤이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건 낭설인 것 같다. 상윤이와 같이 있는 시간이 제일 많고, 다정하게 잘 놀아주기 때문인 듯하다. 저번에 멀건이도 상윤이를 제일 좋아했었다. 어? 그때도 암놈이었는데...?


꽃처럼 예쁘고 꽃처럼 순수하고 꽃처럼 곱게 피어나라고 해서 꽃순이라고 했다. 내가 꽃을 좋아해서 꽃순이라고 했다. 꽃순이가 들어와서 집안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꽃피는 봄이 오면 꽃순이를 데리고 이 동네 저 동네로 꽃구경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