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였던 집안이 딸이 방학을 해서 셋이 되었다. 둘이었을 땐 집안이 절간과 다름없었는데 딸아이 하나가 나타남으로 인해 절간은 겨우 벗어났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매는 안 어울릴 것 같은데 의외로 잘 어울려 놀고 있다. 같이 컴퓨터 게임을 한다던가, 같이 텔레비전을 시청한다든가, 같이 엠피쓰리를 한쪽씩 이어폰을 끼고 듣는다거나. 같이 라면을 끓여 먹거나, 암튼 절간과 흡사한 집에서 잘 어울려 놀고 있다.
셋이서 분담을 해서 집안을 치운다. 아들아이가 청소기를 밀고 다니면 딸아이는 어지른 물건 정리를 하고, 나는 걸레질을 한다. 어떤날은 딸아이가 음식쓰레기가 많다고 잔소리를 해가며 설거지를 하면, 나는 어지르는 걸 취미로 삼고 있는 딸아이에게 잔소리를 같이 해 댄다. “좀, 어지르지 좀 말아라.” 아이 둘은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 만화영화 ‘이따 맘마’ 닮았다고 웃어댄다.
이번 토요일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로 한 딸아이가, 그래서 집에서 늘어지게 책을 보며 어지르며 놀고 있다. 길고 긴 겨울 방학으로 들어간 아들아이가, 그래서 별다른 취미가 없는 아들아이는 거실 바닥 카펫에서 강아지처럼 뒹굴 거리고 있다.
“ 뭐 먹고 싶냐?” 나도 같이 책을 보며 소파에서 뒹굴 거리다 물어보았다.
“난 누룽지 먹고 싶어요. 설탕 솔솔 뿌린 누룽지.”
아들아이는 냄비 밥을 하면 생기는 누룽지가 먹고 싶단다.
“엄마? 난 수제비 먹고 싶어.”
딸아이 대답이다. 수제비 해 먹은 지가 얼마나 됐는지? 기억이 없을 정도다. 좋아 오늘 두 가지 다 해 주마 하고 일단 밥을 냄비에 씻었다. 딸아이가 하는 말이 우린 먹고 싶은 것도 참 소박해 누룽지하고 수제비니 한다.
냄비 밥을 할 땐 밥이 끓어 넘치는 걸 잘 봐야한다. 안 그러면 가스렌지가 엉망이 된다. 그리고 불 조절을 잘 해서 뜸을 들이는 것이 냄비 밥의 요령이고, 적당히 누룽지가 생길정도로 뜸을 들여야 누룽지가 맛있게 생긴다. 점심땐 아들아이가 원하는 설탕뿌린 누룽지를 만들었다. 밥을 푸고 뜨거울 때 설탕을 솔솔 뿌리면 달콤하면서 고소하니 와작와작 씹는 맛 좋은 설탕누룽지가 된다. 친정엄마는 엉덩이 볼록한 솥에 밥을 하셨다. 내가 어릴 적엔 밥통이 흔하지 않았으니까 연탄불이나 곤로에 밥을 하셨는데, 엄마는 항상 누룽지에 설탕을 뿌려서 반으로 접어 나와 동생에게 간식으로 나눠 주셨다. 밥 먹은 뒤의 설탕누룽지는 아끼며 먹는 특간식이었다.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 아이들에게 해 줬더니 맛있게 후딱 먹어치운곤 했다. 특히 아들아이가 누룽지를 엄청스레 잘 먹었다.그러다가 요즘은 귀찮아서 밥통으로 밥을 해 먹다보니 누룽지는 추억의 맛으로 전략을 해 버리고 말았다. 오늘 낮에 누룽지를 먹는 아들아이 표정은 맛있어 너무 행복해요. 였다.
저녁엔 딸아이가 먹고 싶다는 수제비를 준비했다. 감자를 넣고 멸치국물을 내서 만드는 수제비는 나도 좋아하는 음식이다. 난 밥보다 밀가루 음식을 좋아한다. 하루에 한 끼는 밀가루 음식으로 때울 때가 대부분이다. 학창시절엔 빵을 좋아해서 짝꿍이 붙여준 내 별명이 빵순이었다. 나는 소식가라서 밥도 한 공기 넘치기 않게 먹고, 반찬도 표시나지 않을 정도로 깨작거리며 먹는데, 빵은 하루에 한번은 꼭 먹어야했다. 쉬는 시간이면 빵을 사서 먹는 걸 보고 빵순이라는 별명이 붙어버렸다. 나는 살은 없이 삐쩍 말랐는데 키가 남들보다 큰 편이다. 아마도 빵을 매일 먹어서 키가 컸을 것이다.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으면 키가 큰다고 옛날부터 어른들에게 들은 말이다. 밀가루를 주식으로 하는 서양 사람들이 키가 커서 그런 말이 생겼는지 아니면 밀가루엔 진짜로 키가 크는 영양소가 다량으로 들어 있는지 그건 모른다.
딸아이가 수제비를 한 그릇을 먹고 또 먹었다. 엄마가 해 준 음식이 맛이다나 하면서 국물까지 비워냈다. 나도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엄마가 어릴 적에 해 준 음식이 좋다. 친정엄마는 힘들게 노점상을 하시면서도 자식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잘 해 주셨다. 설탕 뿌린 꽈배기도 생각난다. 왜간장에 졸여주던 메뚜기도 생각난다. 깻잎장아찌도 짤짜름하니 뜨거운 밥에 얹어 먹으면 한 그릇 금방 해 치웠는데...직장 생활을 할 때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다. 대기업 다닐 때였는데, 사장님이 갑자기 시간은 없고 식사는 하셔야하고 그래서 여직원 도시락을 하나 골라서 드셨다는데 그게 하필이면 내 도시락이었다. 깻잎을 싸 간 날이었는데, 사장님 비서를 통해 들은 이야기는 반찬이 맛있어서 잘 먹었다고 나한테 전해 주라고 하셨단다. 그렇듯 친정엄마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시간만 나면 간식도 잘 해 주시고, 그걸 맛있게 먹는 자식들 모습을 보며 드시지도 않고, 흐뭇하게 웃기만 하셨다. 자식 입으로 음식 들어가는 모습이 부모님들은 제일 좋다고 하지 않았나…….
나도 장사를 하기 전엔 간식까지 집에서 해 줬다. 반찬이나 김치를 사 먹질 안았다. 어릴 적부터 친정엄마가 해 주던 음식을 먹어 버릇을 해서 그런지 사 먹는 건 들쩍지근하니 입에 맞질 않아서 나부터 먹기가 싫어서 뭐든지 내 손으로 해서 먹었다. 항상 포기김치를 해서 냉장고에 그득 넣어 두었고, 때마다 냄비밥을 했고, 즉석에서 반찬을 했다. 국도 빠지지 않았다. 비오는 날은 부침을 해서 이웃친구를 불러서 창 넓은 창을 바라보며 나눠 먹었다. 한창 살림에 빠져있을 때가 좋을 때였다. 맛있는 걸 내 입맛대로 해 먹고, 깔끔하게 청소하고, 예쁘게 집안을 가꾸던 때가 옛이야기로 남아 있다.
삼년동안 장사를 하면서 친정엄마가 살림을 해 줘서 반찬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이제는 손 많이 가는 것은 귀찮다. 그런데 딸아이가 방학때만 되면 하루종일 이거 먹고 싶네 저거 먹고 싶네 주문도 많다. 엄마가 해 준 음식이 제일 맛있다고 하니 안 해 줄 수도 없고, 기숙사 식당에서 먹는 것이 시원찮음을 알기에 요즘 다시 음식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이도 아이들이 소박한 음식을 좋아한다. 집안형편을 알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하긴 먹고 싶은 거 못먹을 정도는 아니다. 나이가 먹을 수록 어릴적에 해 준 음식을 좋아하니, 딸아이가 성인이 됐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참치 넣은 김치찌개, 김치 넣은 된장찌개, 버섯을 겪들인 삼겹살, 으깬 감자와 돈가스, 간장에 졸인 우엉볶음, 해물떡볶이, 버섯과 떡을 끼운 떡꽂이, 계란에 적신 토스트, 감자 넣은 칼국수나 수제비, 팽이버섯을 넣고 끓인 라면, 김 넣은 계란말이. 사실 별로 까다롭거나 어렵지 않은 음식이다. 누구나 좋아하고 흔하게 먹는 음식을 딸아이는 성인이 되면서 다시 찾아내고 잘 먹는다. 봄엔 직접 캔 냉이무침을 좋아하고, 여름엔 오이무침을 넣은 냉면을 좋아하고, 겨울엔 라면과 떡을 넣어 만든 라볶이 같은 좀 어렵고 복잡한 걸 주문해서 귀찮고 하기 싫지만 자식 입으로 음식 들어가는 것이 제일 흐뭇하다는 엄마이기에 해 줘야할 것 같다. 에그그..봄이면 호미 들고 냉이 캐러 기찻길 뚝방으로 가야하나보다. 여름엔 오이를 꽉 짜서 빨갛게 조물조물 무쳐 냉면을 끓여야하나보다. 겨울엔 라면과 떡볶이와 해물이 잘 조화를 이룬 라볶이를 만들어야하나보다.
그래도 즐겁다. 절간도 아니면서 절간 분위기가 낫던 집안이 딸아이 하나로 웃음이 창밖으로 삐져나간다. 아들아이와 대충대충 해 먹었는데, 제대로 음식을 해 먹어서 냉장고 안과 부엌이 복잡해졌다. 음식을 해 먹고, 서로 분담을 해서 치우게 된다. 딸아이가 소매를 걷고 설거지를 하고 아들아이는 행주로 식탁을 닦는다. 나는 소파에 앉아 리모콘을 쿡쿡 누른다. 요즘 연말이라 시상식이 많다. 대리 만족이라도 연예인들 상타는 모습에서 눈시울도 뜨거워지고, 같이 웃고 같이 행복해진다.
내일도 냄비밥을 아주 잘 해서 누룽이를 알맞게 노릇노릇 구워야겠다. 그럼 내년에 중학생이 되는 아들이 누룽지를 박박 긁어 엄마도 드세요 하면 , 엄마는 배불러서 먹기 싫다 너나 다 먹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