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에 초상이 났다
동부댁 아지매라꼬 노환으로 별세하셨다는 어머니의 전화다
팔십하고도 한해를 더사신 아지매의 별세소식에 요즘 문득문득 느끼는거지만 또한번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본다. 23년전 시집가던날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을 돌고나니 시댁식구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연애결혼은 내가 첫타자 였고 내위로 갓결혼한 사촌형님과 동부댁 아지매의 둘째며느리인 송도형님이 유일한 같은 편이였는데 사촌형님은 20일 살고나니 덧정없는지 은행원인 사촌시숙을 졸라 부산으로 억지로 분가를했다
그래서 동부댁 아지매네 둘째형님과 나는 시집식구 득실대는 골짜기에서 시집살이를 했는데 게다 내 타이틀은 종갓집 종부라고들 일러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종가집 종부의 권리는 뒷전이고 의무만을 강요당했지 않았나...그런 생각이 든다
사촌형님이 용감하게 울고불고 날리를친 끝에 은행원인 사촌시숙을 따라
분가를 하고 몆달후 큰집인 우리집에 인사를 왔었다.
그때 나는 고된 시집살이에 중간을 달리고있을때였는데 살림난 그형님이우찌나부럽든동.
단발머리 나폴 거리며 뽀얀화장을 하고 세련된 롱치마를 입고 논둑길을 걸어오는데 내몰골과 비교되어 어디로 숨고만 싶은 심정이 들었다
23년전 22살 때 촌골짜기로 시집을 와보니 아랫마을 윗말을 큰마을 작은 마을 이란 명칭아래 앞을 둘러보아도 뒤를 둘러보아도 집안 아지매고 아재요 되련님이고아가씨들뿐이였다.
예나 지금이나 시댁 집안은 들어온 며느리들을 따뜻이 품고 보듬는 분위기 아니였다
그렇다고 시댁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고 꼭 댓명의 아지매들이 악역을 맡았는데 그중 동부댁 아지매가 밸난 아지매로 들어온 며늘리들에겐 경계의 대상이였다.
지금 이니까니 경계의대상 이니 뭐니 표현을 하지만 새댁시절 에는 그저 발발 떨며
머리 조아리고 아지매 들을 공경?을 했었다 30대때만 해도말이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들어온 며느리들이 사십이넘고 오십을 바라보다보니 한분두분 아재들이 돌아가시자 펄펄날던 아지매들은 힘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세대교체가 되고 있었다
이번 동부댁 아지매의 3일장이 있던날..
전날 자정이 임박해 돌아가셨기에 출상날 빼고는 하루뿐이였다
천명의 문상객을 하루 만에 치르자니 그것도 퇴근무렵에 몰리는 문상객들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밥푸는 담당은 운좋게 내 아랫동서였는데 국푸는 당담을 맡은 육촌형님은 고생깨나 하는 눈치셨다 국푸는 것이 쉬울 것 같아도 그리 간단 하지만은 않다
국물과 건더기의 조화를 이루려면 상당한 기술이 필요한데 커다란 솥 앞에서 깝치는 가운데서 큰국자로 국을 푼다는 것은 새댁들은 절대로 그 적절한 양 을 맞출수가 없다 그것은 내가 해봐서 안다..얼굴은 벌개지고 들이미는 쟁반들 위에 재바르게 턱턱 국을 떠서 올려 놓다보면 내가 뭐를한건지 어리벙벙해지는 그 국푸는 자리를 육촌형님이 맡았고 내둘째동서가 밥푸는자리를 일찌감치 맡아서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형님·~~이리오이소~~~‘”
“햐~~명당자리 잡았네..자자 밥퍼보자 ”
한참을 밥을푸다보니 20일 시집살이 끝에 용감하게 살림나간 사촌 형님이 오셔서 나를 툭 친다. 이형님은 우리집안에 유일한 반항녀 였는데 우리는 감히 상상할수 없는
반항을 하기도 했다 명절날 결석 하기 집안행사 무시하기 등등 발칙한?행동등을 무수히 했었는데 이형님이 몇 년사이에 편한얼굴로 대소가일에 참석하기 시작하더니 이번 초상때 속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내가 진즉 마음을 비웠으면 수십년 긴세월을 괴롭지가 않았을터인데”
나는 야물딱지다못해 콕 찌르면 피한방울 날것같지 않던 형님입에서 괴로웠다는 단어가 나오자 깜짝 놀래서 형님에게 물었다
“어머.형님 너무 의외다...형님도 괴로움이 있었어요?”
눈이 동그래져서 묻는내게
“나는 사람아이가..와 괴롭지가 않았겠노..시집 이라꼬 와보니 시아버지는 내 키<160>작다카고 인물<오밀조밀 여성스럼움> 없다꼬 노골적으로 트집잡는데 미치겠드라.게다 술주정이 심하니 내가 오고 싶어겠나...명절 며칠전부터 가슴 쿵쿵거리고 명절 쇠고오면 스트레스가 말도 몬했지..”
그랬다 그형님은 술사심한 시아버님이 4년전 간경화로 돌아가신후로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 했다. 그형님의 고백에 시댁 근처 사는 나를 비롯한 며늘네들이 거들었다
“그래도 형님은 멀리 떨어져서 살았지요..”
"그래도 형님 시어머님은 어질기라도 하셨지요"
“술은 형님네 시아버님만 드셨나요..저도 같은 환경이였지요”
“형님이야 일년에 두 번 명절때뿐이지만 옆에 사는 우리들은 365일 시달렸지요”
“우리는 순종하고 살았고 형님은 반항을 했지요”
“우리끼리 그랬어요 어찌보면 형님같이 똑뿌러지는 며느리도 있어야한다고..”
너두나도 한마디씩 던지자 형님은 의미 있는 말을 한마디 하며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래 자네들은 인정을 하고 살았기에 나보다 마음이 편했고 나는 그환경을 인정몬해 괴롭게 살았지..지금 생각해보니 나도 진작에 자네들 처럼 인정을 했으면 좋았을걸..그런생각이 드네..”그 형님의 고백에 다들 고개를 끄떡이며 맥주 담긴 종이컵을 만지작 거리며 있었다.
아지매의 발인식은 아침 7시에 치러졌다.
네명의 며느리 울음소리보다 더큰 하나 딸에 울음소리를 달래며 영구차로 향했는데
노란 국화꽃이 버스를 뒤 덮고있었다.
국화꽃 으로 뒤덮힌 영구차에 올라 타니 울고싶지 않아도 울 수밖에 없는 장송곡이 흘러나왔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네..허·~허~~워·~워·~애지중지 키운자식 허허워워·
딱히 아지매가 가심에 눈물이기 보다 내설움에 겨워 울었다는 말이 정확할게다
다들 장송곡을 들으며 홀짝 이는데 영구차 기사가 초초한 전화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딸딸이 준비가 아직 안됐다구요!?지금산에<장지> 가는중인데 딸딸이 없으면 어캐해요!”
상대방에게 화를내는 전화내용이 장송곡속에 간간히 들려왔다 듣다보니 슬며시 의아심이 생겼다.
‘이상하다 쓰레빠<슬리퍼>를 경상도에서는 딸딸이라 카는데
문중산가는데 왜서 딸딸이가 필요치?요즘 새로생긴 장례식 풍속도인가?
딸딸이를 누구한테 신겨서 산에 가는건가?
아니면 아지매 하관할 때 딸딸이를 넣는건가..?
궁금증이 증폭되다보니 울음이 뚝 멈추어졌다.
영구차 기사님이 그후에도 내내 딸딸이 찾는 전화를 하기에 내가 용감하게 물었다.
“근데요..저..기..요..딸딸이가 모라요?”
그러자 영구차 기사님 문중산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손짓을 하며
“딸딸이요?저기 저거여요 ”
버스안에서 유리창으로 넘겨다보나 장지에서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작은 트럭이였다.
잔디와 흙을 퍼날으는 앙징맞은 작은 트럭을 딸딸이로 통하니 당연히 모를수밖에...
상주인 네명의 며느리들도 훌쩍 거리다가 궁굼한 것은 마찬가지인지..
나의 물음에 궁금증이 풀렸는지 울다웃는 진풍경이 벌어졌다...후·~~~
하관을 하고 인부들이 봉분을 만들고 떼를 입히는사이에
웬 출장 뷔페 차동차가 기우뚱대며 산으로 올라와서 금잔디위에 테이블을 만들고
흰색보를 덮는가 싶더니 음식을 좌악 차리는게 아닌가.
알고보니 요즘 장례식날도 출장부페를 부른다 했다.
일일이 밥푸고 국푸고 반찬담고 하는 번거로움 없이 알아서들 갔다드시니.
참말로 세상 편해졌단 생각이 들었다.
다들 직장 생활 하다보니 질부라고는 집에서 펑펑 노는 나만 참석을 했는데
뷔페 덕분에 우아하니 여유롭게 점심을 먹을수가 있었다.
평소 질부들 사이에서 밸나다고 소문난 아지매들이 자리를 깔고 소복이 앉아 있는그곁으로 가기가 싫었다.새댁시절 같으면야 무조건 네네 하며 순종을 했건만
내나이 오십밑자리 깔다보니 나역시도 많이도 뻣뻣해졌다.
그래서 소복이 앉아있는 아지매들을 내가 왕따 시키기로 하고
뷔페 음식을 담아 생전에 나를 인정해주셨던 오촌아재 무덤옆에 앉아
홀로 술갈을 뜨다말고 내모습에 웃음이 픽..나오는것을 수습 할새도 없이
“질부야~~뚝떨어져서 뭐하노..이리온나..”
그래도 내가 신경이 쓰였는지..아지매들의 나를 부르는 소리에 못이기는척하고
낭창낭창 아지매들 무리속으로 끼어들어갔다.
뒤에는 형형색색의 가을산이요
파랗다 못해 시려 보이는 하늘은 늘 그대로였고
앞에는 봉분 만들기가 한창이였다
그중간에서는 우아하니 뷔페 먹는 풍경에
죽은자와 산자의 뚜렷한 선이 보였으니...
저녁 한그릇 뚝딱 비우시고 자는 듯이 가신 편한 죽음을 맞으신 복많은 아지매
한때는 당신의 며느리는 냅두고 질부들 에게 호령을 하신
아지매의 죽음앞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며 "재미나게 살자 인생뭐.별거냐"별생각없이 누구나 쓰는말이 생각나는 요 며칠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