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승진빨로 업된 기분도 한달쯤 지나자
사그라지기시작했다.
청색물감 칠한듯한 높고 맑은 가을하늘이
내 청승병을 슬쩍 터치 하는가 싶더니 가을 하늘아래 주홍점 같은 감하나가
처량스러움으로 다가왔다
늦은밤.
내 삶의 정체성을 짚어봐도 정답은 없었고 물음표를 남겨둔채
뒷베란다 창문을 열어보니 나의 삼십대와 사십대를 지켜본
은행나무가 노란 불을 붙인채 활활 타고 있었다
마흔 다섯에 가을은 깊디깊은 우물만큼 깊어만 가고 한장 남은 달력을 떼어내며
상념속에 빠져들었다
우울한 며칠을 뒤로하고 남편의 출신학교 에서 가는 정기산행에 동행을 했다
전날 불면의밤을 보낸탓으로 컨디션은 밑바닥을 기었지만
산에 오르면 쇠진한 기가 채워지는 산맛을 알기에 남편을 따라 나섰다.
동창회관앞에서 회원들을 기다리자니 부인네는 나혼자뿐이라
잠시 집으로 갈까말까 짜잡대다가 노란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 2차 집결지에서 지난번 산행때 안면을 튼 부인네들이 보이자
적지속에 아군을 만난 기분이 들면서 서서히 기분이 깨어났다
도심을 벗어나면서 가을색이 완연하다
물감을 흩 뿌려놓은듯 가을산들은 색깔의 향연이 골짜기마다 절정에 달했고
구불구불 천황산 가는길은 고등어 창자속처럼 미로 같았다
그 미로같은 길목마다 가을의 색색에 고운 함성들이 들려오고
우리 일행들은 가을산에 감탄하며 여기저기 탄성이 터져나왔다
경관좋은곳에 서구식으로 지은 집들이 나오자
누군가 "집 잘지어 났네."무표정하게 한마디 하는데 나도 모르게 쿡..하고 웃음이 나왔다
누가 경상도 싸나이 아니랄까봐 서울남자들 같으면
"야.~집 멋있다~~"표현을 했을텐데 "
"집 잘지어났네 "오리지날 경상도식 표현법에 웃음을 참느라 잠시 애를 먹었다
오락가락 하는 변덕스런 가을날씨속에
천왕산 등산로 초입에 도착 했다.
등산로 초입은 밋밋한가 싶더니 그것도 잠시
마음에 준비도 덜됐는데 성질급하게 가파름 부터 시작되었다.
세상사 이치가 힘듦 뒤에는 댓가가 있듯이 가파른 등산로를 쌕쌕 거리며 올라가자 .
영남의 알프스라는 명성답게 아름다운 경치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산정상 가까히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는다는것은
자연만이 해낼수있는 능력이 아니겠는가?
사자평원에 억새풀은 이미 은빛물결은 아니였지만 갈색물결이 대신해서 장관을 이루고
갈색물결속에 중성으로 변해가는 중년 아낙의 메마랐던 감성은
바삭바삭한 억새풀속에 바스러지고 있었다.
잠시 원초적 고독을 즐기며
마음의 응어리들을 풀어 놓자 가슴 밑바닥 서러움이 울컥 솟아 올랐다
남편도 든든한 아이들도 좋은 벗들도 채워줄수 없는
내가 느끼는 정신적인 허기의 근원은 어디서 오는건지 ..
거슬러 올라가는것도 잠시 "수열아`~"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다른길로 빠진 그날의 이단아? 남편친구 수열씨를 찾는 애타는 고함이
천왕산 억새밭을 쥐 흔들고 있었다..ㅎㅎㅎㅎ
가을햇살과 간간히 내리는 가을비 사이로 무지개가 떴다
무지개를 언제 보았던가..
뜻밖에 자연의 선물에
우리 일행들을 무아지경에 빠지게 했고
무지개 주위에는 알록달록 색채놀이가 환상을 자아냈다.
때마춰 운무가 무지개를 타고 있었으메..
그리고 나또한 속세의 시름을 잊고 있었으메..
그날 무지개는 계획에도 없는 최고의 옵션으로
천왕산을 올라가는 원기소 같은 영양제가 되었다
보기와 다르게 천왕산 올라가는 마지막 길은 멀고 험했지만
멀고 험한만큼 천왕산 정상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정상에서 바라보니 영남의 알프스 라는 간월산 ...?...?<일곱개라 했는데 까먹음>
봉우리들이 우리를 유혹 하고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겹겹의 가을산이 투명한 햇살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빛나고
청색빛 하늘 아래는 솜사탕 같은 운무가 발아래서 노닐다 유유히 흘러갔다
조금전 지나온 억새밭은 여전히 바삭대며 사자평원에 바람을 잠재우고
한무리 새떼가 푸드득 거리며 억새밭에 은밀함의 여운을 안고 높게 비상하고 있었다.
그때 이광조에 "나들이"란 평화로운 노랫말이 떠올랐는데
가사가 잘 생각이 안나 노랫말에 일부인"발길따라.."를 반복하다보니
레코드판에 고장난 튀는 바늘이 제자리 걸음을 하는것처럼
"발길따라..발길따라..발...길 "만 연발하다가
"태우새댁 이거 먹어요 "말한마디를 해도 사람을 유쾌하게 만드는
남편친구가 휙 던져준 포도즙을 뜯어먹으며 나의 기억력의 수명이 다됐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하산길은 산책로 같았다
낙엽 쌓인 산능선은 보드랍고 폭신해서 융단 같은 길을 내려왔다
하산길이 다소 멀어서 지칠때쯤에
우리 일행들은 영남의 알프스 천왕산 깊숙한곳에서
속세로 점점 가까와지며 인간의 세계로 유턴하고 있었다.
동동주와 찌짐 한접시 앞에 만면에 웃음들이 가득하다.
작은거에 행복을 느끼는 찰나였다
산은 묘한 매력을 발산 한다.
힘들고 지칠때면 평길을 내어주고
편한거에 익숙해져 안락함을 느낄대면 눈앞에 가파름을 선사한다.
산은 사람을 다스리는 테크닉 뛰어나며
고통과 희열을 주면서 마음에 날을 둥글게 깍아주며 달랬다 왈갰다 반복하며
그어떤 깨우침을 준다.
시름을 받아주고 시름이 빠져나간 그자리에
온화함을 채워주는 공기청정기 역활을 톡톡히 해낸다
그래서 많은이들은 산을 예찬하며 순리를 배우고 이치를 배우고 교활함을 버리나보다
적어도 산을 타는 그 시간만은..
비움이 있어야 채움이 있다기에 마음의 체지방을 버리고
행복의 사이즈를 반은 줄이고 집에오니.
다시 사이즈가 늘어난다.다시 원점이다
나의 스트레스의 근원지가 오늘의 산행을 도루아미타불로 만들어 버렸다
다음주에 또다시 산을 찾아야겠다.
행복의 그릇을 줄여주는 산을 찾아서..또다시..
추신.동해님 ..무지개 찍힌 사진이 있는데 올릴줄을 몰라서요..그거 올리는거 어케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