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손윗 올케가 셋 있습니다.
그녀는 둘째올케입니다.
...입니다라고 그렇게 현재진행형을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중학교 3학년때 그녀를 처음 만났습니다.
오빠와 함께 집에 인사하러 온 그녀는 집안이 환하게 예뻤습니다.
남자형제만 넷에 여자형제가 없던 나는
언니라 부를 수 있는 그녀가 참좋았습니다.
오빠와 언니의 틈에 끼어
나바론의 요새인가하는 영화구경을 간 날이었습니다.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갈색포장지에 싸인 리츠크랙카를 벙어리장갑 낀 손에 쥐어주던게 생각납니다.
과자란건 단 줄만 알고있었던 내게 그맛은 참 경이로웠습니다.
지금도 "언니"하면 리츠크랙카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그까닭입니다.
한국은행에 다니던 언니는
모두가 부러워할만큼의 미모에 키도 그당시로서는 아주 큰 168인가 그랬습니다.
신혼 6개월을 우리집에서 함께 지냈는데
항상 눈화장까지 곱게 한
화사한 한복차림의 아름다운 신부였습니다.
언니가 방에서 나와
내 방 마루를 끼고 ㄱ자로 돌아 부엌으로 가던 모습이 눈에 서~언 합니다.
고2 여름방학이었습니다.
오빠와 언니가 저와 제친구들을 데리고 여름캠프를 가기로 했었는데
엄마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었지요.
새색시가 어딜 가느냐고요.
그럼 포기했어야했는데
철도 없는 내가 친구들과 함께 오빠와만 캠프를 갔었습니다.
지금도 그생각만 하면 언니에게 많이 미안합니다.
오빠는 또 무슨 재미가 있었을라구요.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때
오빠는 조선일보기자였고 삼청동에 살고있었습니다.
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상경하여 오빠네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밤이면 언니와 함께 세숫대야에 목욕용품을 챙겨 삼청동 계곡으로 목욕하러 다니곤 했었는데
그즈음 언니에게서 샴푸를 처음 들어 알았습니다.
푸스스한 반곱슬머리라서 별명이 총채머리이던 나는
하이타이로 머리를 감으면 때가 잘빠진다는 친구의 말을 믿었다가
머리가 풀먹인 사자머리처럼 되어 혼이 난 적도 있었지요.
샴푸로 감은 후 달라진 머릿결의 촉감과 함께
엎드려 머리감던 수돗가와
빙그레 웃던 언니의 얼굴,분홍색 스웨터까지
지금도 어제일인양 손에 잡힐듯 생각납니다.
언니는 요리솜씨가 좋았습니다.
겨울이면 마루에 놓인 연탄난로 위에선 늘
김치찌게나 돼지뼈를 넣은 비지찌게 냄새가 구수하게 났었습니다.
점심땐 아랫목에 깔아 논 담요밑에 다리뻗고 앉아
쇼트닝 넣어 볶은 김치볶음밥을 함께 먹곤 했었지요.
언니와 난 오이지를 참 좋아했습니다.
어느 여름날엔 둘이 마루에 앉아 점심을 먹다가
물에 띄운 오이지가 좀 모자라는듯 하자
밥을 먹다말고 골목 끝에 있는 시장으로 달려가 오이지를 더 사왔었지요.
그리곤 다시 밥을 먹으며 한참을 마주보고 웃었습니다.
그림같이 행복한 여름날의 오후였습니다.
머리에 셋트마는 방법도 언니가 가르쳐줬습니다.
화장하고 한숨자고 일어나면 화장이 곱게 먹어 더 예쁘다고도 말했었지요.
어느날,명동에 있는 언니친구가 하는 싸롱에 가서 원피스를 맞췄었고
주황색 체크무늬의 그 원피스를 친구들은 많이 부러워했었습니다.
버스에서 옆에 앉았던 남학생이 영화과에 다니냐고 물었던 날도 그 옷을 입은 날이었지요.
내가 어른이 되어가는 날들 옆엔 항상 언니가 있었습니다.
언니는 적십자사 봉사활동도 하고
수영,등산,여행도 하며
항상 열심히 사는 활기찬 모습이었고
행복해 보이는 언니모습이 늘 나는 좋았습니다.
결혼한 내가 첫아이 입덧을 할때
이상하게 충무로 진고개식당의 불고기만 괜찮았는데
인천에 살고 있던 언니가 먼거리를 마다않고 올라와 불고기를 사주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게를 사가지고 와 게장을 만들어주던 일도 있었고
큰 아이가 대학입학시험을 치를 때
바구니 하나가득 찹쌀떡을 해서 보내 준 일도 가슴아프게 떠오릅니다.
함께 추억을 만들어 온 언니.
늙어가면서 함께 옛일을 얘기해야 할 언니.
그녀가 갔습니다.
그녀의 가지가지 모습들이 마음속에 가득하고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지만
고통없는 아름다운 곳에서 편안한 안식을 누리리라 믿습니다.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사랑하는 조카 영미도 함께겠지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