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떠난 첫사랑
낙엽이 하나... 둘... 시린 바람과 떨어질때면 나는 앞서 기억하고 만다. 애써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시린 바람만큼이나 차가운 겨울이 오는 걸 느낄 때면 어김이 없다.
어른들 말을 빌리자면 우린 ‘파릇파릇’ 했다.
20살 나이가 주는 생기만큼이나 우리 만남 또한 엉뚱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고3시절 같은 실장이라는 명패로 안면을 트고 우연찮게 같은 특할활동반에서 만난 것이 우연이라면 우연이었까? 졸업을 한 후 2년 만에 재수를 하고 들어간 꿈으로 가득찬 대학시절 꼭 해보고자 했던 ‘기타 동아리’ 방문을 여는 순간 그 까까머리 10반 실장이 기타를 연주하며 문소리에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몰랐다. 그가 나의 사랑이 될줄은...
10반 실장은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동아리 방에서 만큼은 선배대접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나에겐 곤역이었다. 존댓말을 하라고 하질 않나, 기타를 가르친다는 핑계로 구박을 하질 않나, 정말 더러워 못해먹겠다 할 정도로 나만 괴롭히는 10반 실장이 정말로 얄미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렇게 얄밉다가도 강의 빈 시간 틈틈히 혼자 열심히 기타 연습하고 있을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커피 두잔을 들고 와서는 ‘야! 신입생 마셔. 선배가 주는 커피는 블랙커피라도 달다나 어쩐다나’ 이야기 하며 건네면서 기타도 가르쳐 주고 또 그럴때면 괜히 싫지 않은 것이 미운정 들었다 고운정이 들었다 하면서 내 마음을 그 커피 한잔에 빼앗길줄은 모랐다.
그 후로 가끔 학교에서 서로 오갈 때 마주칠때면 10반 실장은
‘야! 신입생 커피 한잔 사라.’
‘아직 밥 안 먹었는데....요?’
‘그럼 밥은 내가 살께. 가자.’ 하면서 선배라는 권력 아닌 권력으로 나는 점점 그와 함께 밥먹는것도 함께 커피 마시는 것도 일상처럼 편해져 버렸다.
선배와 후배의 벽을 허물며 캠퍼스 커플로 인정되면서 우린 그야말로 닭살커플이 되어 캠퍼스는 물론이고 동아리방에서도 우리 커플 애정은 A+였다.
하지만 우리의 애정을 시기라도 하듯 사랑은 이별을 예상치 못한 자리에서 만나야했다.
겨울방학을 함과 동시에 나는 시골로 내려갔다. 여자의 특성상 아버지께서 ‘어디 여자 혼자서 ... 당장 내려와...’ 불호령을 받고서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적막같던 시골에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유일한 소리.
‘오늘 내려온다구?’
오랜만에 보는지라 유난히 치장을 하고 터미널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야~~ 여기 정말 좋다. 공기부터가 다르다.’
‘그래? 난 네 냄새가 더 좋은데....?’
눈처럼 눈부신 데이트를 끝내고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자판기 한 잔의 커피로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래고, 기다려도 오지 않던 버스는 이럴때면 유난히 빨리 도착하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조심히 가고. 또 언제 얼굴 볼수 있을까?’
‘밥 많이 먹고... 콩도 골라내지 말고 잘 먹고... 많이 웃고... 내가 보고 싶은데 볼 수 없고, 전화도 안 되면 알지? 이 맛난 커피 마시면서 울고 웃었던 지난 우리 추억 들쳐보기...’
‘어디가? 왜 그래? 이상하게...’
그랬다. 그는 이상했다. 버스를 타는 모습이 그렇게 쓸쓸해 보일수가 없었는데, 창문 너머로 건네는 편지는 정말이지 받고 싶지 않았다. 그는 편지 한 장 내 손에 남겨놓고 그렇게 떠났다.
‘미안해. 영원히 널 잊지 못 할꺼야. 나도 네가 미치도록 보고 싶고, 죽도록 그리울 땐 아마 어디선가 커피를 마시며 옛일을 되새기고 있을꺼야. 아무런 변명도 이유도 못하고 떠나는 내가 많이 원망스러울꺼야. 하지만 날 이해해주길 바래. 먼 훗날 우연이라도 만나면 그때 용서를 빌께. 사랑해.’
가을바람이 문을 두드리고 난후 겨울꽃이 내릴때면 난 유난히 커피를 즐긴다. 예전엔 그가 사무치도록 보고파서 마셨고, 시간이 지나서는 그가 죽도록 미워서 마셨다. 세월이 흘러서는 아름다웠던 옛 첫사랑을 추억하고 싶어 마시고 있다. 아픔이 기억이 되어 추억이 되기까지 항상 내 곁엔 따뜻하고 포근한 커피 한잔이 그렇게 겨울에 말없이 떠난 사랑을 대신해 주었기에 지금의 내 추억까지 향기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