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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그 나무의 이름을 모른다


BY 제라늄 2005-09-03

나는 지금도 그 나무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한쪽 면은 푸른 색을 그리고 다른 면은 푸른색에 뿌연 흰 색을 덧칠한

그 나무는 내게는 동화이다.

 

복잡한 것이 섞이지 않았던 어린 시절,

그 나무로 둘러싸여진 우리집 울타리는 내게는 큰 놀이터였다.

 

나무는 집을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었는데

밖에서는 안의 풍경이 안에서는 밖의 풍경이 들여다 보이지 않아

집은 마치 작은 성 같았다.

그러나 그 곳에도 허술한 곳은 있었다.

어떤 곳에는 어른 주먹 보다 더 큰 구멍이 있어 밖의 풍경을 볼 수 있었는데,

성을 벗어나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밖의 풍경을

그 주먹에 눈을 갖다 대고는 엉덩이를 쑥 뺀 채 밖의 풍경에 심취하곤 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곳은 더 허술하여 벌어진 가지 사이로 작은 내 몸이 쑥 들어가곤 했다.

 

홍당무가 헛간 같은 작은 곳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장면이나

올지도 모를 적에 대비하여 로빈슨 크루소가 집 주위에 이중으로 나무를 심어

요새화 하는 이야기등에 이미 심취해 있던 나에게

그 곳은 작은 몸을 숨기고 상상의 이야기를 만드는 비밀스러운 장소가 되었다.

나는 하이디가 되었다가 홍당무가 되었다가

아니면 읽었던 어떤 이야기에도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이 되어 그 곳에서 우주를 만들곤 했다.

 

여름이 한 참 지친 오후이면

그 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먼저 잎을 축 늘어뜨리곤 했다.

그러다가 한 잠 자고 난 뒷날 오전이면

쨍 하고 들어오는 햇살에 잎을 세우고는 해를 눈부시게 담아 내곤 했다.

 

어떤 것이 강하면 다른 것은 무디어지는지

가을의 그 나무를 나는 기억해 내지 못한다.

 

그 우주의 안 밖을 드나드는 동안 나는 쑥 쑥 자랐고

나무는 동화로 남았다.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그 나무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동화로 남겨진 나무를 늘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름이 익어 나무들이 늘어질 때면 그 나무를 생각하곤 했다.

 

여행길이었다.

 

그 해 여름도 해는 익을 때로 익어 아래의 모든 것들을 군림하고 있었다.

잎들은 해의 기운에 아래로 목을 늘어뜨리고

나무는 해가 눈치라도 챌까봐 속으로만 열심히 물을 올리고 있던 날이었다.

 

나는 걸으면서 해의 군림을 마음껏 즐기고 있던 중이었다.

나무들이 섞인 집들이 보이기도 하고

그러다가 그 집들이 사라지기도 하던 길이었는데

군림하던 해보다 먼저 내 눈에 그 나무가 들어왔다.

어렸을때의 동화 속의 모습 그대로 그 나무가 그 곳에 있었다.

익은 여름에 잎을 늘어뜨리고 뿌연 흰빛이 나는 그 나무가 그 곳에 있었다.

 

가슴은 저리고

잊었던 동화는 빛의 속도보다 더 빨리 튀어 나와 가슴을 금방 젖게 했다.

한달음에 달려간 그 곳에서 잎을 쓰다듬기도 하고

작은 구멍을 찾아 여기 저기를 한 참이나 살피기도 했다.

작은 구멍이라도 발견하면 그 구멍을 통해

안에 가두어 두었던 어린 시절의 동화가 마구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해가 지엄한 힘을 다 쏟을때까지 그 곳을 떠나지 못했다.

 

이제

나는 여행길에서 본 그 나무를

언젠가는

어른을 위한 동화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동화는 늘 아름다운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