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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의 여자


BY 다정 2005-09-02

딸아이는 언젠가부터 나를 보고 '화요일의 여자'라고 합니다.

나머지 요일은 그저 맥을 놓고 있다가 화요일은 아침부터 생기가 돌고

자꾸만 아이에게 치근덕거리기도 하고, 곰살맞게 이것저것 챙겨주고

활력만점의 여자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그러네요.

이곳으로 이사를 온지도 햇수로는 어언 3년이 되었어요.

똑같은 방향으로 똑같이 빛이 바랜 풀잎의 옷을 입은 시멘트의 거대한 숲속에서

제 집을 찾기도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했었고

엘리베이터안에서 눈동자를 어디 두어야 할지 막막했던 위아래층의 이웃도

이젠 안부를 곧잘 묻기도 하는 여유가 생겼네요.

 

한동안은 집안에서 살림을 엄청 살뜰하게 잘하는 여자처럼

매일을 그렇게 보내다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곤

대충의 묘미도 즐기며 이젠 거의 미루어 두는 형으로 바뀌어 버렸지요.

슬슬 꾀가 나기 시작 하니 밖의 소식에도 귀를 기울이고

세탁소 옆의 슈퍼에도 들락거리고

그 슈퍼를 건너 분식집을 하다가 슈퍼를 하는 그 집도 발을 붙이고

그 옆으로 비디오 가게에도 이틀에 한 번 꼴로 눈을 맞추고

그러다 보니 놀이터에서 아이들도 구경을 하고

간간이 한가한 아줌마의 특성상 말도 건네어 보기도 하기에 이르렀죠.

그 날이 아마 화요일 일겁니다.

 

약간은 따가운 햇살아래에서 발을 흔들며 앉아 있는데

대형 버스가 한 대 들어 오더라구요.

시의 표기가 선명한 버스였는데, 도서 대여차였더군요.

한 손에는 막대 사탕을 든 양갈래 머리의 여자 아이랑 엄마.

아이를 업은 젊은 엄마

유모차를 밀고 온 아직은 새댁 같은 엄마.

간혹 나이가 있어 보이는 아저씨등등

앉아서 구경을 하기에는 도저히 궁둥이가 들썩거려서

그냥 저도 그들을 따라 버스에 올라가 보았지요.

 

시내 버스 정도 크기의 안쪽으로는 양옆으로 빼곡하게 책들이 꽂혀 있었고

관리하는 분한테 모두들 아는 체를 하며 인사를 건네더군요.

약간은 어색해 보였던지 그분이

저를 슬쩍 보길래 , 아마 처음은 그냥 봐도 알아 보나 봅니다.

이름과 주소를 적고는 대출증을 받아 들었어요.

무료 대출증, 말만 들어도 기분 좋은 무료..후후

 

어느 덧 일년이 지났네요.

장길산을 만나고, 해변의 카프카를 흐릿한 영상처럼 떠올리고

페미니즘적인 여성학을 다시금 엿보고

아리랑 고개를 흐느적거리며 여름을 보내고

바둑 두는 여자를 보며 남북 전쟁의 샤먼을 건너 보고

눈으로, 마음으로 참으로 긴 여행을 했답니다.

근 이백여 권에 이르는 각각의  책들을 접하며

늦은 남편의 귀가에도 자리를 비켜나 보이고

시험 기간만 되면 소설 속에 묻혀 지냈던 단발머리 여학생처럼

마음을 밝히는 재미를 다시금 알게 되었지요.

 

애석하게도 아이는 책하고는 거리가 멀기에

제 엄마가 책을 끼고 앉아 있으면

알러지 반응도 보이곤 하지만

저 또한 아이는 별종으로 여기기에 이젠 그러려니 합니다.

잠을 자면 딱 좋을 두께의 책을 빌려 왔다고

넌더리를 내긴 하지만

각자의 취미 생활이 다르기에

책 좀 봐란 소리도 이젠 그만 하려고 합니다.

 

아래쪽 칸으로는 유아들의 그림책이 꽂혀 있거든요.

삑삑거리는 슬리퍼에 겨우 걸음마를 떼는 아이들도

앉아서 얼마나 잘 보던지, 그럴 때면 꼭 한 번씩 머리를 쓰다듬곤 하죠.

이것저것 책을 고르는 아이 엄마들의 정성도 너무 이쁘고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 엄마들은 대부분 아이들의 책만 고른단 점이죠.

아마도 제가 제 책만 낼름 고르듯이 그러하겠죠.

 

베갯머리에서 나름대로 목소리의 구성도 곧잘하며 그렇게나 책을 읽어 주었었는데

아이는 일 년에 몇 권 볼까 할 정도로 책을 멀리 합니다.

체질상 저하고는 맞지 않다나요.

그나마 다행하게 교과서는 읽으니......

 

덥수룩한 머리도 단정하게 빗질을 하고

꽃 무늬 치마도 살짝 다려 입고

맆스틱도 얼핏 바르고

화요일 오후가 되면 또다시

설레이며 책을 마중 가려고 합니다.

굳이 책 속에 길이 있느니 없느니 그런 진부한 말보담

글쎄요, 사랑하는 이의 눈 속에 담긴 나를 보는 벅찬 뿌듯함이 더 나을 듯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