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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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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굿모닝


BY 워킹코알라 2005-08-27

 

드디어 다음 역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이 와르르 밀려들기 시작한다.

그래 차라리 떠밀려서 멀리 갔으면 좋겠다. 나는 사람들의 물결에 밀려서 이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순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던 그곳으로 한 아저씨가 총알 같이 날아왔다. 그리고 눈깜빡할 사이에 문제의 그 자리를 점령해 버렸다. 나는 치미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채 고개를 돌려 아저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저 뿌듯한 표정은 영화속 컴퓨터그래픽을 사용한 것처럼 순식간에 찌그러진 얼굴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겪은 재앙을 똑같이 겪게 될 것이다.

*


  1년 넘게 눈치밥 먹던 백조 생활을 접고 드디어 새 직장으로 출근하는 첫날. 하지만 설레던 마음은 점점 짜증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깝게 앞의 전철을 놓친데다 이번 차는 도착이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겨운 담배 냄새를 풍기는 넥타이, 젖은 물미역 머리, 허옇게 뜬 화장발, 찢어져라 하품하는 힙합바지, 향수냄새가 지독한 하이힐...  같이 부데껴야할 전철 동지들이 주위에 빽빽이 몰려있다. 그 사이에서 나는 마치 전동차를 끌어당기기라도 할 것처럼 차가 들어오는 방향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마침내 전동차가 역내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앞줄에 선 나는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런데 천천히 멈추는 전동차 안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 놀랍게도 빈 자리 하나가 있었다. 이런 출근 시간에, 더구나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전철안에서 빈 자리가 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날렵한 행동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나는 문이 열리자 마자 꿀을 발견한 벌처럼 맹렬하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같이 뛰어든 아주머니는 나의 날쌘 동작을 따라잡지 못했다. 잠깐 주춤하더니 이내 다른 곳으로 방향을 바꾸고 만다.

나의 승리다. 숨을 고르면서도 나는 영악하게 승자가 된 기쁨을 티내지 않기위해서 눈을 감는 여유까지 부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나는 곧 주변의 공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앉은 자리 주변에는 사람들이 전혀 서있지 않은 것이다. 콩나물 시루같은 전철 안에서 유독 내가 앉은 앞 공간만 뻥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의 가장자리에 선 사람도 인(人)벽을 뚫고 들어 가려는 듯 내가 앉은 자리에서 최대한 멀어지려고 애쓰고 있었다.


  안됐다는 듯 바라보는  아주머니의 시선 따라 고개를 숙인 나는 깊은 신음소리를 토해내고 말았다. 세심하게 닦아서 광을 낸 구두가 누군가 게워낸 오물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래서 이 자리가 무인도로 남은 거야. 사람들 틈에 끼여 죽을 지언정 발도 내릴 수 없는 자리에 누가 앉아 있겠어. 당연히 더 이상 앉아있을 수 없었던 나는 낭패한 얼굴로 엉거주춤 일어섰다.


  일단 구두에 묻은 오물을 털어내야 했다. 빨리 이 달갑잖은 주인공의 역할을 벗어나서 비웃는 시선들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빽빽한 사람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틈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없이 오만상을 찌푸린채 구두발자국 모양이 찍힌 오물근처에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다음 정거장에서 문이 열릴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