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바,다는 경제가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던 1997년 IMF 시절부터 지금까지 각 시민단체나 사회단체에서 '절약하고 검소하게 살자'라는 슬러건 하에서 전국적으로 퍼져간 일종의 boom이었다.
아껴 쓰고, 나누어 쓰고, 바꾸어 쓰고, 다시 쓴다는 구두쇠 작전과 금 모으기 운동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었고, 그 결과 몇 년만인지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으나 국제적인 신용등급도 올라가고 달러 보유율도 위험 수위는 벗어난 것 같아서 겨우 한숨을 돌렸는데 그 후유증이 너무 길었나 보다.
빈익빈, 부익부의 고르지 못한 생활 수준이 서민생활에 점점 틈새를 벌려 놓았고 중산층이 사라지는 기현상이 가파르게 퍼져 나가는 현실이 겁이 났다.
아직도 바닥을 헤매는 우리 경제를 보니 암담하고 다음 세대를 책임져야 할 내 아이들의 장래가 걱정이 되어서 가끔씩 내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기도 했다.
별로 유복하지 않은 집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은 우리를 굶기거나 남의 집으로 보내는 불행한 일은 하지 않으셨고 그래도 남이 하는 공부 어느 정도는 마치게끔 해 주셨다.
검소하신 부모님 아래서 허리띠 졸라매는 법을 배웠고, 돈의 위력이 어느 정도의 힘이 되는 지도 알게 모르게 체험하게 되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내 봉급은 몽땅 아버님께 건너가서 쥐꼬리만한 용돈만을 건네 받았지만 불평을 할 수 없었음은 아버님의 검소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힘든 아버지를 대신해서 동생들 공납금과 용돈까지 내 봉급으로 충당되었지만 이것 역시 난 보람으로 여기며 결혼할 때도 내가 모아놓았던 돈으로 할 수 있었다.
결혼 후에도 월급 장이 남편을 둔 까닭에 내 주머닌 여전히 얇았지만 큰 욕심 없이 내 범위 내에서 지출하고 모자라면 씀씀이를 줄였다.
하루도 빼 놓지 않고 가계부를 썼고 될 수 있으면 나한테 소용되는 부분은 최대한으로 아꼈다
청바지 하나와 슬리퍼 한 개로 사계절을 버틴걸 눈이 무딘 남편은 알 턱이 없었지만 드러내 놓고 한마디 불평도 쏟지 않았다..
'바가지도 습관이다' 라는 생각이 항상 내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고 시시콜콜 구차한 소리하는 게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남편 옷을 제외한 내 옷과 아이들 옷은 거의 남의 것을 갖다가 입고 입혔지만 조금도 부끄럽다거나 비관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수입품을 짜면서 남은 실로 아이들 옷이랑 양말 장갑 모자 등을 마련했고 선물해야 할 곳에는 남은 실로 옷을 짜서 주기도 했다.
이웃에게 헌옷 달라고 했을 때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상한 듯이 쳐다보았지만 난 조금도 꿇릴게 없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살았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아나바다' 라는 사회적인 행사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헌것을 남에게 준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처럼 드러내놓고 달라고 하지 않은 바에야 선뜻 줄 수도 없던 시절이었다.
자칫하면 좋은 뜻이 왜곡되어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기에 신중하게 생각해야 했다.
내가 세 들어 살던 집에는 집주인이 연세 드신 어른이었는데 그 집의 외손주가 가끔씩 오는데 옷과 신발이 많이 낡아 있었다.
내 아이들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길래 줄어든 내 아이가 입던 옷을 주었다.
아이들 생일선물로 받은 고급 옷이 아이들 체형을 전혀 가늠하지 못하고 산 고모들의 실수로 몇 번 입지 않았는데도 작아서 입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맘만 여기고 그 옷을 주었더니 주인 아줌마의 눈 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가는 걸 보았다.
"내가 아무리 없이 살아도 이런 옷은 안 입히니더........"
난 쥐구멍이라도 기어 들어가고 싶었다.
사는 게 그리 넉넉지 않은 주인 아줌마지만 '남의 것'과 '헌 것'에 대한 거부 반응은 내 상상을 초월했다.
'없이 산다고 무시한다'라는 얼토당토 안한 오해를 나한테 대입시킨 것이었다.
그 뒤로 난 아줌마를 똑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남의 것은 왠지 찝찝하고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입으면 몸이 스물거린다고 하던 주인아줌마의 새파란 표정이 한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형제간에는 내려 입고 물려 입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시대와 별로 간격이 넓지 않았지만 남의 것은 싫다는 아줌마를 무조건 잘못 되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기천원짜리 새 옷이 기 만원 하는 헌옷보다도 더 대우받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돈을 많이 주고 산만큼 몇 해를 입어도 새 옷같이 말짱한 헌옷을 그냥 버린다는 게 너무 아까웠다.
우리들 인식이 새것에만 너무 무게를 두고 있어서 재활용의 길을 막는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요즘 젊은 새내기 주부들의 절약정신은 우리세대가 치루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우리세대는 무조건 안 쓰고, 덜 쓰고 부족해도 참고 견디며 살았지만 이젠 그 틀이 달라졌다.
싸고, 양 많고, 질 좋은 곳을 두루 섭렵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터넷 보급이 일등 공신이지만 깨어있는 인식에다가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아끼는 방법을 알고 있고, 나누어 쓰는 지혜를 가지고 있고, 바꾸어 쓰는 센스와 다시 쓰는 알뜰함을 어느 샌가 몸 구석구석으로 보여 주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반면에 항상 마뜩찮은 눈길 보낸 게 있었는데 일회용 기저귀 사용이었다.
시대가 변하고 사고의 틀이 예전하고 비교가 안될 만큼 비켜나 있었지만 기본적인 양식만큼은 지니고 살았으면 하는 욕심이 언제나 내 혈압을 올렸다. - 이상하게도 난 일회용 기저귀에 알레르기를 일으킬 만큼 거부 반응을 보이곤 했다.
비용도 문제지만 환경파괴의 주범이 되고 있는 현실이 너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하는 일 없이 그렇다고 별로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로 항상 구차한 소리하는 철없는 새댁에게 한마디 따끔하게 일침을 놓은 적이 있었다.
내가 가게를 꾸려 나갈 때 비교적 외식에 맛들여진 젊은 새댁들을 상대 할 때가 많은 편이었다.
나이 스물 두 살의 결혼 2년 차 철부지 새댁이 갓 돐 지난 아들을 데리고 매일 내 가게에 오다시피 하다보니 속없이 털어놓는 그녀의 사생활을 다 알 수 있었다.
매일 와 준 덕에 다소 매상은 올릴 수 있었지만 내 맘은 영 불편했다.
남의 집 농사 거드는 남편의 월급이 100여 만원이 채 안되었지만 그녀의 영양가 없는 씀씀이는 어림잡아서 하루에 2~3만원정도가 되는 것 같았다.
필요이상의 긴 폰 통화도 맘에 안 들었지만 패드형도 아닌, 값도 만만찮을 팬티형 기저귀를 연신 돈타령하면서도 오줌 한번 지린 기저귀를 아무 생각 없이 갈아주는걸 보니 입이 딱 벌어졌다
내 성격상 한마디 걸쳐야 했다.
" 이봐 애기 엄마, 천 기저귀 좀 쓰면 안되나?.....이건 값도 비쌀 건데......"
내 딸아이보다도 더 어리고 어느 정도 만만하고 친해 졌기에 쓴 소리를 했더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아이고 참 내.....요즘 누가 무식하고 귀찮게 그런 거 써요? 시간도 없는데....."
하루종일 빈둥거리는 그녀의 생활을 알고 있는 내 앞에서 시간운운 하길래 돈 보태 주는 것도 없으면서 언성을 좀 높혔다.
"이렇게 돈타령할 시간에 기저귀 빨아 쓰면 안되나?..군것질도 좀 줄이고..."
샐쭉한 표정 지우는 그녀에게 한마디 더 보탰다.
"이젠 딴 데 가서 돈 쓰라....이제부터는 여기오지말고......."
말하자면 단골을 내 쫓은 거다.
그 뒤로 딴 데로 갔는지 정말로 씀씀이를 줄였는지는 몰라도 한동안 안 보이더니 어느 날 이사 간다고 하면서 불쑥 찾아 들어왔다.
인사드리러 왔다고 하면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이는데 천 기저귀였다.
시어머니가 사다준걸 귀찮아서 안 쓰고 있다가 나한테 혼난 뒤로 쓰기 시작했다고 자랑 비슷하게 털어놓는 그녀를 난 꼭 안아 주었다.
시어머니보다 내가 더 무서웠다고 하면서 샐샐 웃는 모습을 보니 왠지 눈물이 날것 같았다.
나에게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현실위기감에 너무 무디어져 있는 세대들과 구석구석에서 비명이 쏟아져 나오고 극한 상황까지 몰고 가는 사람들이 날마다 메스컴을 울리고 있는데도 남의 얘기인양 팔짱끼고 방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분노를 느끼는 건 비단 나뿐이 아닐 것이다.
어제를 다시 들여다 보수 없고 내일을 미리 볼 수 없는 현재에 좀더 맑고 밝은 혜안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면 참 좋겠다.
가끔씩 실없는 짓거리 하고 있습니다......지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