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3.1절 연휴에 일본으로 여행 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47

단속대상 1호가 되다


BY 송영애 2005-06-28

      단속대상 1호가되다.
      송영애
      내 나이 열 여덟 살의 어느 날이었다.
      꽃다운 나이에 미싱소리 지겹게 들리는 봉제공장에 앉아서
      원단을 자르고 다림질하는 시다만 하기에는
      창 밖의 햇살은 너무나 눈이 부셨고 열어 놓은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봄바람은 열여덟 꽃피어나는 내 가슴속을 살랑살랑 흔들기에 충분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남순이와 나, 그리고 현주는 우리들만의 신호로 야릇한 미소를 보낸 후
      작업현장을 빠져나왔다.
      점심시간이 되어도 회사 밖으로는 나갈 수 없었던 우리들은 살금살금
      공장 담벼락을 향했고
      맨 먼저 담을 잘 못타는 남순이를 올려서 넘기고 키는 크지만 용기가 없어
      담을 제대로 넘지 못하는 현주를 올리고
      그 다음에 담을 잘 타는 내가 담을 훌쩍 넘었다.
      "와우! 성공이다!"
      우린 서로 저도 모르게 함성을 지르다가
      멀리 떨어져있긴 하지만 경비아저씨가 들을까 봐
      다시 도둑고양이가 되어 살금살금 큰길로 빠져나왔다.

      철없던 우리들은 봄 햇살에 반해, 봄바람의 유혹에 넘어가서
      오후근무를 하지 않으려고 빠져 나온 것이었고
      막상 빠져 나오니 마땅히 갈곳도 없었고 할 일도 없었다.
      배가 고팠던 우리들은
      "돈가스 먹으러 '로망스'갈래?"라는
      남순이의 말에 누가 반대할 것도 없이 그러자 하고
      동네에 하나밖에 없던 '로망스'라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서로를 촌년이라 놀렸던 우리들은
      레스토랑에 앉아서도 몇 번 먹어보지 못한 돈가스 먹는 법을
      서로 잘난척하며 가르쳐주기도 하면서 깔깔거리며 먹어댔다.
      손님이 별로 없는 시간이라서
      구르는 말똥만 봐도 웃을 나이라는 꽃다운 나이의 우리들의 웃음은
      조용한 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레스토랑을 시끌벅적하게 뒤집어 놓았다.

      가끔 커피 마신다며 분위기 잡고 촌스럽게 자주 앉아있었던 터라
      레스토랑 사장님과도 친하게 눈웃음을 주고받고
      대화도 몇 번 나누던 사이였기에 레스토랑 사장님은
      우리들의 소란을 이해해주며 뭐가 그리 좋으냐며 웃기만 했다.
      돈가스를 먹고 수다를 떨다보니 시간이 꽤나 흘렀다.
      일할 때는 죽어라 시간이 가질 않더니 일을 하지 않고 도망쳐 나와서 놀려니
      불안한 마음에 시간은 너무나 더디게 흘렀다.
      중간에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면 과장님한테 혼날 게 뻔하고 해서
      우린 다음엔 무엇을 할까 상의를 하다가 가까운 인공폭포에 들러서
      시원한 폭포 구경하고 한강으로 가서 바람쐬자고 합의를 했다.

      꽃다운 젊음은 그렇게 풀어놓으니 대책 없이 뛰어다녔다.
      인공폭포에 가서 들어가지 말라는 표지판도 무시한 채 들어가서
      물장구를 치고 함성을 지르며 아름다운 봄날의 오후를 즐겼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철없고 대책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땐 그 방법이 최고로 우리의 기분을 고조시킬만한 분위기였다.
      그것도 좀 시들해지자 우린 바로 뒤에 있는 한강으로 내달렸다.

      강물은 주체할 수 없는 햇살을 버겁게 안고 출렁이고 있었고
      꼬물거리며 기어 나오는 새싹들은
      강과 아스팔트를 초록의 끈으로 이어주려는지 싹을 틔우느라 분주했으며
      하늘은 파랗고 우리들의 마음은 그대로 하늘로 붕 떠오를 것만 같이 흥분돼 있었다.
      소리를 지르며 그냥 달렸다.
      공장에서의 답답함을 떨치고
      가위질하느라 물집 잡힌 손을 하늘로 휘저으며,
      종일 서서 다리미질하느라 아픈 다리도 무시한 채.
      그러다가 힘들면 강가에 앉아서 물수제비도 떠보고
      누워서 하늘도 쳐다보다가 고향의 가족이야기를 하며 셋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가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회색 빛으로 변해 가는 하늘이
      한강을 어슴푸레 덮을 때쯤 시계를 보니 근무시간이 끝났다.
      그때부터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데 걷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활기찼던 우리들은 어디로 가고
      소심한 서로의 마음을 들킬 새라 우린 최대한 말을 아끼며 회사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과장님도 퇴근했을 것이고
      무서운 미싱사 언니들도 퇴근했으리라 생각하며
      살금살금 기어서 경비실을 살짝 보니 경비아저씨가 회사 쪽을 향하여 앉아 계셨다.
      큰문은 닫혀있고 작은 문이 열렸기에 우린 서로 눈짓을 한 후
      차례대로 고개를 최대한 낮추고 앉은걸음으로 경비실 옆을 지나치는데
      경비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이 놈의 새끼들! 니들 빨리 경비실로 들어와!"
      늘 인자한 웃음으로 우릴 아껴주고 사랑해 주시던 경비아저씨가
      그렇게 화내시는 건 처음 본 터라 우린 금세 눈물을 뚝뚝 떨굴 표정을 하며
      경비실로 들어섰다.
      경비아저씨는 바로 인터폰을 누르시더니 퇴근한 줄 알았던 과장님을 부르셨다.
      아! 그때의 가슴 두근거림은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해보지 못했던 심한 흔들림이었다.
      '우린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더 내려갈 수 없을 만큼 숙이고 있는데
      과장님께서 우리에게 차례대로 꿀밤을 먹이시더니
      "얼른 식당에 들어가 밥 먹어 이 자식들아."
      정말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린 고개를 숙인 채 우리의 귀를 의심하며 서로를 힐끔거리다가
      얼른 들어가라는 경비아저씨의 말씀을 듣고서야 그곳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물론 그 날은 무사히 넘어갔지만
        다음날부터 우린 회사에서 정문만 나갔다하면
        제일 먼저 관리자와 경비아저씨의 철저한 단속대상1호였다.
        회사 안에 있는 기숙사에 있던 우리들은 가까운 곳에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꼭 경비아저씨에게 보고해야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했지만
        그 날의 짜릿한 추억은 두고두고 조금씩 꺼내어 곱씹어도 맛있는 추억으로
        내 속에 한가득 자리잡고 있다.

        그 후,
        경비아저씨는 우리만 보면 재미있다는 듯이 혼자 웃으시며 우리의 머리에
        꿀밤을 한 대씩 먹이곤 하셨다.
        요즘 같은 세상엔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시골에서 중학교만 마치고 공장에 취직한 우리들을
        안쓰럽게 생각하고 딸처럼 대해주시던 과장님과 경비아저씨의 배려가
        간절히 그리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