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러 갔다가 남편이 [만능 크리너]란 물건을 카트에 담을 때만 해도 난 저 남자가 또 쓸데 없는 걸 사고 있군 하며 눈을 흘겼었다.
난 관심없다는 듯 그 물건에 눈길도 안 줬다. 장엘 가도 난 꼭 필요한 반찬거리와 생필품 외에는 보지도 않는다.
한데 남편은 이 코너 저 코너를 꼼꼼하게 살피고 뜻밖의 물건들을 잘 산다. 남편이 그 용도를 아무리 신나게 설명해도 내게 그런 물건들은,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것들을 처음엔 아무 데나 툭 던져 놓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묘하게 제 값을 하기 시작한다. 이 만능 크리너 경우도 그렇다.
그냥 물티슈처럼 생겼는데 이것의 효능이 만만찮다. 가전제품을 한번 닦아봤더니 몇 년 묵은 때가 싹 지워진다. 어찌나 신기하던지...
사실 묵은 때를 벗겨내자면 먼저 수세미에 세제 묻혀 닦아내고 또 물걸레질도 몇 번이고 해야한다.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청소할 결심 한 번 하기가 쉽지 않다.
근데 이 티슈는 톡 뽑아서 슥슥 문질러주면 된다. 너무 간편하다. -요즘 나오는 모든 물건들이 간편함을 겨냥해 만들어지다 보니 일회용 사용이 넘치고 환경은 상처받지만 오늘은 일단 이 문제를 접어두기로 한다.-
책을 보거나 컴퓨터에 매달려 있다가 뭔가 기분 전환이 하고 싶을 때 난 주저없이 티슈를 뽑아든다. 은근히 독한 성분이므로 코팅 장갑을 꼭 껴야한다.
그리고 뭔가 대상을 하나 정해 닦는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닦는다. 열심히 닦다 보면 거짓말처럼 깨끗해진다. 그렇게 밥솥, 냉장고, 컴퓨터, 텔레비젼, 싱크대 등이 몰라보게 반짝반짝해졌다.
가전제품을 다 요리하고 다음에는 뭘 닦을까 두리번거리는데 문에 눈이 갔다. 우리가 이사올 때 하얀 페인트칠을 한 방문들은 얼룩덜룩 때가 많이 묻었다. 아이들 손때가 가장 많다. 슥삭슥삭... 가전제품 만큼의 효과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매끈해진다.
다음은 욕실 청소, 물론 욕실은 세제와 물로 쫙쫙 씻어내지만 손이 닿지 않는 천정이나 모서리의 틈새 등은 의자를 놓고 한번씩 문질러주면 된다.
오늘은 의자를 닦았다. 의자를 뒤집어 놓고 박박 힘주어 닦아냈다. 힘이 드니까 팔을 번갈아가며 했다. 그래도 역시 오른팔이 배 이상 일을 많이 한다. 너무 많이 하면 금방 질려 버리므로 절대 욕심내면 안 된다. 매일 조금씩 일같은 느낌이 들지 않게 쉬는 기분으로 하면 좋다.
가끔 내친 김에 확 해치우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한번쯤 무리해서 해버려도 좋다. 성취감이 쏠쏠하니까.
집안 창이란 창은 다 열어제치고 불어오는 바람 맞으며 물건을 닦다 보면 너무 행복하다.
직장다닐 때는 하루하루 밥만 겨우 해먹었다. 쉬는 날은 청소며 빨래로 출근할 때보다 더 힘들었다. 꼼꼼한 청소는 꿈도 못 꾸었다. 구석구석 내 손을 기다리고 있는 집안을 둘러 보면 한숨이 나왔지만 난 항상 피곤했다.
그런데 이제 시간이 많아졌고 여유있게 집을 치울 수 있으니 너무 좋다. 쓸데 없이 자리만 차지하던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단순하고 깔끔하게 집을 꾸며나가니 큰애가 그런다.
[엄마 우리집이 점점 예뻐지고 있어요.]
쓸고 닦아서 깨끗하게 한다는 건 기분좋은 일이다.
문득 사람의 일도 이 만능 크리너처럼 박박 닦아서 깨끗해질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난 지워버리고 싶은 일들이 참 많다. 뭐부터 지울까?
한데 곰곰 생각해보니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당장 불행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지워야 할 것 같은데, 그걸 다 지우면 지금의 내가 남아있을 것 같지 않다.
다 지우고 내 인생을 처음부터 몽땅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해도 난 그러고 싶지는 않다. 지금 생활에 만족하니까. 남편과 아이와 아직도 세상에 낯을 가리는 내 성격까지....
내가 풍족하게 아무 근심 없이 자랐다면 가족이 둘러앉아 사이좋게 저녁을 먹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었을까? 느긋하게 집안 청소 할 수 있는 여유를 호사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싫거나 말거나 내 과거는 지금 나를 있게 한 은인이다.
그래, 이 티슈로는 물건만 열심히 닦자. 뽀득뽀득 닦노라면 내 마음도 윤이 나겠지.
내일은 또 뭘 닦아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