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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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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나들이


BY 蓮堂(그린미) 2005-06-17

  어스름이 땅바닥을 기듯이 스물 거리며 천천히 내려앉았다.
 뿌연 젖빛 같은 안개가 어스름과 뒤엉킨 채로 시야를  흐트려 놓았지만 자꾸만 방바닥으로 무너지려는 몸을 추스르고 싶어서 둔치로 나갔다.
 이 시간이면  산책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어깨를 부딪혀야 할 정도로 복잡한 둔치는 웰빙시대를 부르짖는 요즘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주변 경관을 정비하는데 적잖은 예산이 투입되는 것 같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을 반으로 잘라서 양쪽에다가 주차장과 산책코스를 곁들이고 산을 깎아 도로를 내면서 부수적으로 캐낸 바윗덩어리를 촘촘하게 박아 놓았다.
 바위 사이사이엔 연산홍과 회양목을 옮겨다 심었고 도로를 접한 너른 공간에다가는 메밀밭을 조성할려는 흙더미를 군데군데 쌓아 놓았다.
 한 눈에 봐도 시야가 트이면서 한번쯤 머물다 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할 만큼 쉼터의 조건이 완벽함에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수술 후유증으로 인해서 아직은 온전하지 못한 몸이기에 살얼음 위를 걷듯, 땅바닥 갈라질까 저어하는 모양새로 사뿐사뿐 내 디디는 발걸음은 외씨버선 신은 새악시 마냥 조심스럽기만 하다.
 우람한 덩치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디디고 선 자리에 진동이 울렸고 코에서 내 뿜는 숨소리가 거칠게 토해져 나왔는데 티셔츠가 미어 터질듯한 등판을 보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저녁에 안 어울리게 sun cap을 눌러쓴 주부들이 떼를 지어서 앞뒤로 팔을 꺾으며 건강지상주의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내 닫는다.
 그래...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는 지극히 평범한 논리를 망각하지 않고 살고 있는 현명함에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다.

 별로 현명하지 못한 내 흔적이 딱지가 떨어지지 않은 채 상채기로 남아 있다.
 
 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가로등 불빛이 애처롭다.
 바람이 불 때마다 수 만가지로 찢어지고 흩어져서 온 강물이 핏빛으로 흥건히 물들여 졌다.
 물 속에 내 얼굴을 담아 보았다.
 어둠에 버무려진 시커먼 물 속에 찌그러진 이목구비가 요동을 쳤고, 일렁거리고 뒤틀리는 어지러움에 속이 울컥거렸다.
 한바탕 거친 숨결로 나를 움켜쥐었던 운명적인 굴레가 서서히 벗겨지면서 어느 샌가 낯선 모습으로 나를 마주한 얼굴은 어디선가 한 두 번쯤 스쳐갔던 기억으로 잠시 혼돈이 왔다
 혼돈의 정체가 결코  미로는 아니건만 시작과 끝이 엉켜있는 듯한 어지러움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잠시의 정체성 분실이 오래도록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옥죄고 있었다.
 잃어버린 건 없는데 듬성듬성 이빨 빠진 듯한 허전함은 상실감이 아닌 욕심이 앞지른 오만일지도 모른다.
 부스스한 몰골은 그동안 나에게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데 부족함 없지만 애써 부정하고픈 이유는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기엔 무언가가 억울한 듯 해명거리를 늘어놓고 싶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화장실 갈 때의 맘과 올 때의 맘이 이렇게 등을 대고 다른 얼굴을 해야 하는 속내를 왜 모르겠냐 만은 나름대로는 억지라도 부리고 싶었다.
 탄력을 잃어버린 지친 듯한 표정과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 같은 눈 두덩이를 간신히 밀어 올리고 또 다른 나를 바라보는 맘은 편치를 않았다.
 얼굴에다가 물을 끼얹었다.
 아직은 밤 공기가 그리 차지는 않지만 살에 닿는 물의 촉감은 온몸의 솜털을 곧추 세웠다.
 정수리에 몰려있는 혼탁함이 어느 샌가 발끝으로 새어 나가는 것 같은 산뜻함에 온몸이 떨려왔다.
 편편한 바위 위에 몸을 맡기고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 읽을려고 눈알을 굴렸다.
 사람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건 어쩌면 실례가 될 것 같아서 초점은 맞추지 않고 근성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사내 아이 둘을 앞세운 젊은 아빠가 아이들과 무슨 얘긴가를 주고받으며 내 앞 가까이 왔을 때였다.
 같이 오던 큰 아이 - 초등학교 2학년 정도 - 갑자기 뒤에 오던 아빠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 아버지...저 먼저 갈께요.......뒤에 오세요....."
 그러더니 앞으로 뛰어갔다.
 순간 내 머릿속은 박하사탕의 그 짜릿하고도 화끈한 향으로 가득 채워지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저 나이의 저 또래들이 하는 말 치고는  너무 이쁘고 너무 기특하다.
 부모에게 반말 짓거리가 하등의 흉 거리나 지적해야 할 일이 아닌 평범하고도 예삿말이 되어 가는 요즘 아이들을 보면 참으로 혀가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 같은 아찔함을 느끼는데 그 아이가 던진  짧은 한마디가 내 핏줄 속으로 흘러 들어온 것 같았다. 
 분명히 올바른 부모 밑에서 올바른 교육받고 자란 아이임이 틀림이 없다는 생각에 그 아이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오래도록 기다렸지만 다른 길로 갔는지 끝내 오지 않았다.
혼자 짝사랑 하다가 바람맞고는 서서히 일어났다.
어스름이 내어 준 자리엔 먹물 같은 어둠이 온통 사위를 장악했고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도 지친 듯 졸린 듯 흔들리는 것 같았다.
 도로 위를 질주하는 차량들도 숨이 가쁜 듯 몰아쉬는 숨소리가 밤 공기를 갈랐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 발길이 줄어들었다.
 돌아가야 하는데 올 때의 거리보다 몇 배는 더 먼 것 같은 아득함이 다리에 힘을 뺐다.
 잰걸음으로 가도 족히 반시간은 더 걸리는 거리인데 주저 앉을 듯한 이 느린 걸음으론 한시간 이상이 소요될 것 같았다.
 스스로에 도취되어서 돌아갈 길 생각 않고 휘적거리고 온 길이 너무 멀다.
 똑바로 펴진 길의 꼭지점이 보이지 않았다.
 꼭지점에서도 한참을 더 가야 하는데............
 자신이 없다.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멀리서 헤드라이트의 번들 거리는 두 눈알이  나를 향해서 서서히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