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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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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저미는 채칼


BY 남풍 2005-06-16

후원 받은 월동무가 많아 무초절임을 하기 위해 통째로 채를 쳤다.

겨울과 봄을 냉장고 안에서 보낸 무는 나의 손놀림에 따라 얇은 동그라미가 되어 .

겨울의 기억들처럼 하얗게 쌓였다.

무는 제각각 울퉁불퉁해 보여도 절단면은 하나같이 고운 동그라미가 된다.

 

 무초절임에 잘익은 갈비를 먹어야 제맛이라는 둥,

어느 갈비 집에는 겨자로 초록색 물을 들여 쓴다는 둥...이야기들도 쌓여갔다.

 

아주 잠깐 눈을 손에서 뗀 사이,

무를 채치던 채칼은 면장갑과 손을 채치고 말았다.

찌릿한 아픔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딱 무의 두께로 하얀 동그라미가 중지에 새겨져 있었다.

팀장은 놀라 구급상자를 꺼내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장갑을 두겹으로 껴야한다는 걸 답답하다는 이유로 거부했었다.

어쩌면, 베어져 나간 살갗의 두께는 면장갑의 두께 만큼이라, 만약 그 말을 들었다면, 손은 다치지 않았을 것만 같다.  혹은 옆사람과 말을 하지말 걸 그랬나. 

 늘 사고는 생기고 보면, "그러니까....내가 뭐랬어" 혹은  "꼭 그럴 것 같더라니..."하는

후회도 아니고 원망도 아닌, 혹은 둘 다이기도 말을 하게 된다.

 상황이 달라지리라 믿는 것도 아니고, 위로를  하는 것도 아닌, 그저 사고란 피하고 싶은 것이므로.

 

사고란 '괴로운 일'이다.

뭔가 정상 궤도 이탈이며,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닌 일이며,

의도되지 않은 일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크고 작은 사고는 늘 보통의 일처럼 빈번하게 일어난다.

예기치 못한 사고든, 만분의 일의 경우에 해당 되는 사고 든, 자주 일어나는 사고든

심각함의 정도에 상관 없이, 피할 수 없는 절묘한 타이밍은  우리를 흔들어 놓는다.

 

 얼마 전 손을 베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사고가 생겼다.

출근 길이었다. 교차로를 빠져 나가는 상황이었는데,

오른 편에 나와 동종의 차가 진행해 오고 있었다.

상대 운전자가 나를 보았을 것이라 여겼고, 이미 나는 교차로를 거의 빠져나간 상황이라

멈추지 않고 그냥 진행했다.

쿵!

 같은 차종의 같은 색깔의 두 대의 차는 길 위에  한참을 그대로 서있었다.

놀라서, 살아 있음에 고마워서, 상대도 살아 있을지 걱정이 되어서.....멍하니 앉아 있었다.

 

가을 바람에 억새가 흔들리고 있었다.

두 대의 차에서 같이 문이 열리고 나온 두 여자,

"출근 길에 놀라셨겠네요."

"반사경에 차가 비쳐서 제차인 줄 알았어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냥 그렇게... 서로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서, 서로 보험회사에 맡기고 그녀는 근처에 있는 직장동료를 불러, 나는 남편을 불러 가던 길을 계속갔다.

그 후  그 교차로를 일시정지후 지나쳐서인지,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사고 중에 괴로운 사고중 하나인 교통사고가 그리 나쁘지 않은 기억으로 남는 까닭은, 그녀의 태도때문이다.

 너무나 태연하게 혹은 의연하게 대처를 해서, 나조차 감히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고는 피하고 싶지만, 피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다.

어차피 생겨버린 사고는 괴로와한다해도 되돌릴 수는 없다.

지나간 상황에 대해 깊이 좌절하는 것은 두 배의 괴로움을 만드는 일이다.

 

중지에 붙여 놓은 일회용 반창고에 빨간 핏물이 배어 있다.

아픔이랄 것은 없지만, 조그만 상처 하나에 큰 체구가 균형을 잃는다.

손가락 하나 불편하니, 글쓰기가 힘들고 , 펜을 잡기가 불편하니, 업무정리가 안된다.

 

 11월 교차로에서 만난 아름다운 그녀의  괴로움에 임하는 방법을 생각해본다.

'사고는 백가지 중 한 가지 괴로움이고,

나머지 아흔아홉가지는 안전하여 감사하다'는.

더구나, 그 손가락의 불편함, 업무정리의 더딤으로 인하여, 한편의 글을 쓸 수 있었음에 감사한 일이라고 가을 바람처럼 속그녀가 속삭이며 지나간다.

 

 우리는 늘 비일상적 사고로부터 일상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