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이였다.
시어머니가 내 집에 머물러있던 시간 .
나는 착한 며느리도 나쁜 며느리도 아니다.
그건 이미 오래전에 결심했던 사실이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한 사람의 어머니로 인정하는 사실 그것뿐이다.
시어머니는 여름에도 오후 다섯시만 되면 추워진다고했다.
시어머니 집에는 오래도록 “돌”침대, 돌씨트가 깔려있다.
수시로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그것은 시어머니에게 둘도 없이 편한 자리다.
시어머니가 조작할수있는 전자제품들은 점점 사라지는 대신 돌침대와
티비리모컨 그리고 당신 아파트의 보일러 이 세가지는 정확하고 노련하게
길들여 놓았다.
아, 그것만이 아니다.
미건의료기라는것이 있어 집에서 아침저녁으로 맛사지를한다.
일주일 너넷번은 홍보관에 다니며 여기저기 주물림을 받고
오래동안 아픈 다리 역시 침을 맞아야 그나마 심리적인 안정을 취하기에
일주일에 한두번은 침도 맞는다.
그것이 우리나라에 홀로 살고있는 78세의 노인의 하루일과다.
그런분이 서울 아들집에왔다.
방4개 화장실 두개.
화장실 가까운곳에 어머니방으로 쓰라고 했다.
그방이 썩 내키지 않은지 중 1된 아들방을 함께 쓰겠다고 했다.
하루종일 방에 티비를 틀어놓고 밤새 불을 켜놓고 주무시려면 혼자 쓰시는게
편하다고 했다.
아들집에는 돌침대가 없다.
옥장판이 있어 그걸 깔아드리고 보일러를 돌렸다.
밤새 뜨끈 뜨끈한 장판에서 주무시고 일어나더니 허리에 옥이 베인다고 치워달라고했다.
아들은 두말없이 치웠다.
5시가되면 추우니 5시에 불을 넣고 새벽4시에 끄라고했다.
나는 대충 4시나5시쯤에 불을 돌리고 내가 일어나는 7시쯤에 불을 껐다.
며칠씩은 볼을 넣어라 꺼라, 덥다 춥다하셨다.
그럴때마다 돌침대 이야기를했다.
다음엔 돌침대를 가지고 오자고했다.
아침을 잘 안먹는 내가 아침을 먹었고 점심도 챙겨드리면서 함께 먹었다.
소화불량에 걸렸다.
가끔 남편을 도와 일을 하지만 시어머니와 있는 동안에는 출근을 하지않았다.
시어머니 오시면서 집에있었다.
하루세끼 꼬박 챙겨드렸다.
내가 답답해 보였는지 내볼 일 있으면 나갔다 오라고했다.
나는 나대로 집에 틀어박혀 어머니가 바람이라도 쐬고 돌아와 주길 바랬다.
아무데도 안나가고 집에서 빈둥대자 이불빨래를 하자,김치를 담그자했다.
그것도 안하고 있으니 손톱을 깍아달라, 다리를 주물러 달라, 머리가 아프니
병원에 가자고했다.
20일 아들집에 있으면서 보름을 병원에 다녔다.
그것이 노년기의 하루였다.
그런 하루가 주어진다는걸 아직은 실감할 수 없지만 슬프긴했다.
시어머니에대한 연민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비애였다.
시어머니는 식성이 좋다.
홍돔 우럭 가자미매운탕에, 조기 갈치에 어쩌다 오징어를 사오면
맛없는 것 사왔다고 오징어를 비웃었다.
바닷가가 고향인 시어머니는 바다에서 나오는 갓 신선한 횟감들을
마음껏 드시고 사신분이다.
보양식으로 좋다는 해안지역의 해산물들은 서울에서는 귀하디 귀한 음식이다.
좋은음식이 무엇인지 알고 가려드실줄 아는분이다.
서울사는 며느리의 살림이 그저 우습고 보잘 것 없어 보일것이다.
김치도 사먹는 며느리가 못마땅하지만 그 부분은 침법하지 않는다.
직장다닌다는 핑계를 될게 뻔하니까.
내 자식들이 모든걸 보고 배울텐데 하는 생각으로 시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게 해드렸다.
나는 아직도 시어머니가 불편하고 무섭다.
그런 감정은 사람을 좋아하기 어렵게 만든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물처럼 흘러 서로에게 자연스레 스며드는 법인데
시어머니의 사랑을 느껴본적은 없다.
자신의 아들밖에 안보여 며느리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
손주한번 안거나 업어서 재워보지 못한 사람
손주생일 아들생일 며느리생일조차 모르고 알려고도 않는 사람
앞으로 당신의 삶은 오직 받아야 한다고 인식되어있는 사람
그 바램을 아들 둘은 너무도 잘 하고있다.
남편은 둘째아들이다.
시골 같은 동네에서도 따로 살고 있는 큰댁과 어머니.
중간에 끼여 맘고생 심했던 나는 세월에 묻혀 그럭저럭 버티고있다.
작은 아들인 남편이 일년에 두 번 한달정도 집에 모시자는 말만 안하면말이다.
한달은 너무길다.
더도말고 둘도말고 일주일간만 계셨으면 좋겠다.
내가 나쁜 며느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