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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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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알기


BY hayoon1021 2005-05-21

요즘 아들은 한글 공부에 한참 열을 내고 있다.

벽에 [한글 공부]라고 붙여 놓은 게 있는데, 닿소리 홀소리가 만나서 만들어지는 글자 140여 개가 빼곡히 정돈돼 있다.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 나냐너녀노뇨누뉴..... 이렇게 나간다.

아들은 일곱 살인데 읽고 쓸 줄을 안다. 내가 귀찮아할 때 가끔 동화책도 제 동생한테 읽어 준다.  

다섯 살이 되도록 말을 잘 못 해서 걱정이 많았던 애다. 주변에서 병원에 가보라느니 그런 얘기까지 나왔었다. 그랬던 아이가 어느 날 말문이 트이고 글눈도 트였다.

다 어린이집에서 충실하게 가르쳐준 덕분이라고 본다. 

아이는 이 글자판을 자세히 들여다 보더니 [사]와 [과]를 합쳐 [사과]라는 말을 만들어 낸다. [우]와 [유]를 합쳐 [우유]가 된다.

받침이 안 들어가는 말 밖에 못 만드니까 몇 개 안 될 줄 알았더니, 웬걸 꽤 많은 말이 만들어진다. 그때부터 아들이 하나 발견해 크게 소리치면 나도 얼른 새로운 말로 되받았다.

바지, 두더지, 바가지, 가지, 나비, 미나리, 도라지, 하마, 쥬스, 아기, 바다....

끝도 없이 나온다. 물론 이건 한 번에 뚝딱 생각난 말이 아니다.

며칠동안 수시로 시합이 붙었다. 아들이 꽤 머리를 굴려서 말을 만들어내는 데 맞춰주느라 나도 억지로 생각난 듯이 응수한다.

한두 번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아들은 집요하다. 밥 먹다가도, 화장실에서 일 보다가도, 심지어 유치원 가려고 신발 신다가도 아들은 뭔가 생각이 나면 쪼르르 달려가서 글자를 조합해 보고 그게 말이 되는지 확인한다. 

그나마 나니까 아들하고 시합이 되지 남편이랑 붙었다면 아마 진작에 남편이 졌을 거다. 아기, 우유, 오이, 바나나 이런 건 쉽게 나온다 쳐도 드라마, 피노키오, 커피, 하트, 하프, 스타, 포크, 고사리 같이 나도 생각지 못한 말이 아이 입에서 툭툭 튀어나올 때는 좀 놀랍다.

그렇게 생각나는 대로 쏟아내다 보니 나중에는 한번씩 만들었던 말들이 다시 나온다.

그래서 하얀 종이에 번호를 매겨 하나하나 적어나가기로 했다.

그러면 한 번 했던 말은 비켜갈 수가 있으니까.

어제 아이와 함께 간추려 보니 100개 단어가 훌쩍 넘는다.

그 전에는 [ㄱ]이 들어가는 말 가지고 며칠 동안 아들과 주거니 받거니 한 적이 있다.

[ㄱ]으로 시작하는 말이 아니고, [ㄱ]이 들어가는 말이면 뭐든 된다. 꽤 많은 단어들이 나왔다. 나중에는 [ㄲ]이 들어가는 말도 포함시켜 주기로 했다.

며칠이고 계속되는 [ㄱ]타령에 보다 못한 남편이 이번에는 [ㄴ]이 들어가는 말도 좀 해 보라고 그랬지만  아들은 끈질기게 [ㄱ]과 [ㄲ]에만 매달린다.

아들과 글자 놀이 하면서 새삼 느낀 건 우리말의 무궁무진함이다.

아들이 조금 더 커서 국어대사전을 보면 얼마나 신기해 할까?

당장이라도 [ㄱ]부분을 펼쳐주며 [봐, ㄱ하나로 시작하는 말이 이렇게 많단다] 하고 싶지만 지금은 괜히 아이한테 혼란만 줄 것 같아 다음으로 미룬다.

아이는 여백도 없이 빽빽하게 써내려간 다음 종이 뒷면에 뭐라고 쓴다.

보니까 [글자 알기] 라고 써놨다.

어쩜 제목 붙일 줄도 알고...

하긴 아이는 뭐든지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작은방에는 저희들 옷장이 있고 빨래 건조대가 있는데, 그 방의 한 면에 아이가 그린 그림을 한 장 두 장 붙이다 보니 지금은 그 벽면이 아이 그림으로 도배가 돼 있다.

아이는 그 벽에 이렇게 써놨다.

1)빨래방 2)옷방 3)그림방

난 평소 문제를 내고 맞추기 좋아하는 아이가 이 중에서 정답을 고르라는 건 줄 알고 제 그림이 있으니까 당연히 3)번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빨래가 가장 눈에 띄니까 첫째는 빨래방이고, 저희들 옷이 있으니까 두번째는 옷방이라는 뜻으로 써놓은 거였다.

다섯 살인 작은 놈은 형과 엄마의 이 글자 게임에 끼고 싶어 안달이다. 그래서 가끔 코끼리니 시계니 엉뚱한 말을 외치기도 한다. 형과 엄마가 경쟁하듯이 큰 소리로 뭔가 말하니까 저도 아무 말이나 갖다대면 되는 줄 안다.  

형과 엄마만 상에 마주앉아 공부하고 있으니까, 저 혼자 작은방 구석에 가 등돌리고 앉아 서럽게 운 적도 있다. 지금은 그저 밥이나 많이 먹어줬으면 좋겠는데, 공부란 게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인지 모르고 덤비는 녀석이 안스럽다.

큰애가 나중에도 지금처럼 즐거운 기분으로 공부를 하고 뭔가를 알아나갔으면 좋겠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공부 자체가 왕이 돼 버려 아이를 지배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아이를 통해 나도 요즘 사물을 다시 보는 즐거움을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