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친구야 우째 지내노?]
항상 잊을만 하면 한번씩 연락이 오는 친구다.
[궁금하면 전화하쇼.]
난 늘 그렇듯이 거만하게 답을 날린다.
나는 이제 부양가족이 생겨서 쓸데없는 전화요금에 탕진할 돈이 없다, 그러니 소식 궁금하면 먼저 전화하라고, 난 결혼하고 바로 그 친구한테 요구했다. 친구는 독한 것, 하며 혀를 차면서도 순순히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곧바로 전화가 온다. 그리고 내 아이들과 남편의 안부까지 골고루 다 묻는다.
이 친구는 내가 서른 즈음에 무작정 상경해 다닌 화실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다. 이 친구 말고도 그때 화실에는 나랑 같은 동갑내기 남자들이 셋이나 더 있었다. 홍일점 여자친구가 생긴 그들은 앞다투어 나한테 친절을 베풀었다.
그 중 한 남자를 짝사랑했으나 그는 저 세상 사람이 되었고, 또 한 남자는 내 친구와 결혼을 했고, 이제 두 남자만 남았다. 그들과 인연을 맺은 것도 그럭저럭 십년의 세월을 올라간다.
남편도 같은 일을 했던 사람이라 두루두루 아는 처지들이다.
결혼하고 얼마간은 이 친구들과 터놓고 지냈다. 남편도 한두 번 술자리에서 함께 어울렸다. 그들은 나만의 친구가 아니라 남편과도 친구가 되었다. 내가 바라던 그림이었다.
그러다 한번 남편과 싸움을 하게 됐는데, 말끝에 남편이 [그래, 철수(가명) 그 놈한테 갈 걸 그랬지?] 했다. 어찌나 황당하던지...잠시 싸움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었다.
난 자연스럽게 다 친구가 된 줄 알았는데 남편의 본심은 그게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나중에 덧붙인 남편 얘기는, 질투 따위가 아니고 그 친구 자체에 대한 불만이었다. 둘이 여자들처럼 전화로 수다떠는 꼴이 가관이라는 거였다. 남자답지 않다는 것, 하긴 그 친구의 여성적인 그런 면이 우리 사이에 많은 기여를 했다. 어쨌건 그 날 난 편치 않은 남편의 심기를 처음 발견한 셈이다.
하기야 난 남편의 사촌 여동생들이 문자 보내는 것도 달갑지 않았었다.
[당신들 진짜 사촌 사이 맞아?]하며 생트집을 잡기도 했다.
친오빠들한테도 낯 간지러워서 그러지 못하는 나로선 꼬박꼬박 안부 주고 받는 그들이 너무 낯설었다. 더구나 야심한 시각에 술 한잔 하고 보내는 듯한 묘한 분위기의 문자라니 원...
내가 몇 번 빈정댔더니 남편은 그 뒤로 문자가 오면 슬그머니 처리했다. 나 역시 언제부턴가 이 친구들과의 연락을 비밀로 하고 있다. 문자나 전화 통화 후에도 바로 삭제해 버렸다.
이거 어딘가 불순한데?
혹 누군가 오해할 지 몰라 덧붙이자면 그 친구들은 성별만 남자일 뿐이지 정말 여자친구와 다를 바 없다. 한데 섞여 화실 생활을 하다 보면 묘하게 성의 중성화가 이루어지는데, 우리는 그 시기에 다져진 우정이기 때문에 확실히 건전한 관계다.
나는 남녀공학을 안 다녀서 모르지만 동창 친구들과 비슷한 감정일 거다.
오늘 통화의 요지는 첫 월급을 탔으니 한 턱 내겠다는 거였다.
이 친구도 결국 10년 이상 팠던 만화를 접고 직장에 들어갔다. 돈 안 되는 만화만 그리고 있다간 장가고 뭐고 다 글렀다는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인 거다. 착하고 세상물정 모르고 그저 순수하기만 한 친구다.
그래서 기꺼이 점심을 먹어 주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근데 남편한테 얘기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좀 고민이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겠지 하는 쪽으로 결론이 모아진다.
부부 사이는 서로의 맘을 들여다볼 수 있는 투명한 창이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