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날 낳으시고
올해로 칠순을 맞으신 아버지는 지난가을부터 눈에 안개가 덮인 것처럼 앞이 흐려 보인다고 하셨다. 노인분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눈의 수정체에 흰 막이 끼어 시력의 장애를 주는 백내장이라는 질환이라고 했다. 며칠 전에 큰 동생댁이 내게 전화로 아버지의 백내장수술 날짜를 알려주며 걱정을 한다. 딴에는 며느리 입장이라 직장 때문에 시간은 내지 못하고 걱정은 되고 내게 은근히 코맹맹이 소리로 구원을 요청한다. 내가 올케더러 아마도 시누에게 자기아버지 수술이니 가보라고 통보하는 간 큰 올케는 너 뿐일 거라고 일침을 놓으니 올케는 금방 꼬리를 내리며 형님 먹고 싶은 것 다 말해보라며 나를 구스런다. 제일 시간이 한가한 내가 아버지 구원병으로 낙찰을 보고 올케와 전화통화를 끝냈다.
몇 년전에 한쪽 눈을 수술한 경험이 있어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쓰여 집에서 한 시간 반을 달려 마산에 있는 백내장 전문 안과로 갔다. 대부분의 환자가 노인어른이고 한쪽 눈에 보안대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평생을 요긴하게 소중하게 써 왔을 눈(目)에 대한 일종의 보수작업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나 소진한 기능을 다시재생해서 쓸 수 있게 의술을 베푸는 의사선생님들의 손길이 경이롭다.
아버지가 계시는 회복실에 찾아 들어가자 부모님은 자식의 출현에 반색을 하면서도 바쁠 텐데 뭐 하러 왔느냐고 한다. 아버지는 수술한 지 두 시간 정도 지나있어 마취가 풀리는 과정인지 머리가 몹시 아프다고 하셨다. 나는 수술부위가 이상이 있나 하는 염려로 아버지를 모시고 담당선생님을 만나러 진료실로 내려갔다. 아버지의 눈을 살피고 난 뒤 선생님은 수술 후의 눈의 상태는 정상이라고 했다.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마취가 풀리는 시점에 과다한 신경 집중이 두통을 동반할 수 있다며 진통제를 처방해 준다. 아버지는 진통제를 먹고도 한참을 두통에 시달리더니 약기운이 도는지 잠에 취한다. 잠든 아버지의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아픔이 저려온다. 연세에 비해 아직은 주름살도 많지 않으며 머리카락색도 그만하면 검은 편이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어린애가 보채듯 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더 이상 그 옛날 말쑥한 신사는 아니었다. 젊은 날에 아버지는 훤칠한 키에 반듯한 모습에 점잖고 과묵하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그 어떤 비바람에도 꿈쩍하지 않고 꿋꿋이 서있던 고향마을 앞 정자나무 같은 분이었다.
父兮生我 母兮鞠我 哀哀父母 生我 勞 ( 부혜생아 모혜국아 애애부모 생아구로)
欲報深恩 昊天罔極 (욕보심은 호천망극)
아버지는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애달프다 부모여 나를 낳으시기에 애쓰시고
수고 하셨도다.
깊은 은혜를 갚고자 하나 넓은 하늘은 참으로 망극하다.
명심보감의 말씀이 내 가슴의 아픔을 더 한다. 부부가 살아가면서 가장 큰 스트레스가 배우자를 잃는 것이라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아버지는 불혹의 나이에 당신의 배우자를 먼저 보냈다. 여고생이었던 나는 내 슬픔도 견뎌내기 힘든데 주위어른들은 맏이였던 내게 어른스런 딸로 치부하며 되려 아버지를 위로하기를 바랐다. 어머니의 부재는 나날이 깊이를 더하며 아버지의 가슴에 두꺼운 무게로 무너져 내렸으리라. 그렇게 안으로만 자신을 다독이던 아버지는 밤늦게 들어오는 횟수가 늘어가고 술 냄새를 풍기며 잠든 내 머리맡에 앉아 한참을 멍 울진 울음을 토해내며 내 머리를 쓰다듬곤 했다. 난 아버지의 술 냄새도, 차디찬 그 손길도 내게는 살갑지가 않았다. 그렇게 위중한 병도 아니었는데 어머니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원망이 아버지를 향한 똬리를 틀어가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칠팔 개월이 지났을까 어느 정도의 어머니에 대한 애도 기간이 끝났다고 여겼는지 주위에서 아버지의 재혼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버지는 몇 번은 거절했다는 것을 나는 아버지의 본성으로 미뤄 짐작해 볼 일이지만 계속되는 권유에 아버지도 더 이상 버티지를 못하고 반허락을 한 상태가 되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맏이인 나의 인정을 받고 싶었던 거다. 아니 아직 동생들은 아버지의 재혼에 관여해야 할 만큼 성숙한 나이가 못 되었다. 20년을 어머니와 한 세월이며 우리 4남매의 의식 속에 아직 어머니의 죽음을 겨우 받아들인 시점에서 아버지의 재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부도덕한 처사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전처자식이 줄줄이 네 명에다 시부모에 그런 악조건의 결혼을 하려는 그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가 없었다. 나의 반대에도 아버지의 재혼은 계속 진행되었고 첫눈이 내릴 계절에 아버지는 재혼 했다. 그녀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나보다 열 살 위의 어머니를 얻게 된 셈이었다.
아버지가 재혼을 한 후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분가를 하였고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학업을 위해 집을 떠나 살게 되었다. 그녀에게서 엄마라는 자비로운 애정은 애초 바라지도 않았거니와 엄마라는 거룩한 단어에 걸맞은 모정을 기대하기보다 그저 아버지의 배우자로서 아내이기만을 바랐다. 어쩌다 마주할 때 마다 야릇한 그녀의 미소 뒤에는 언제나 굵직한 그녀손가락에는 새로운 반지가 번득였고 색깔을 달리하는 목걸이를 보는 것이 더 낯익었다. 결코 녹녹치 못하리라는 것쯤은 미혼인 나로서도 짐작은 되었지만 전실 자식이 넷이나 달렸고 시부모에 그런 결혼을 할 때는 그런 자기만족이라도 취할 양으로 결혼을 결심하지 않았을까 하는 나의 의구심은 그리 잘못된 사심이 아니었다. 그녀가 우리 집에 들어 온지 오년쯤 지나면서 나의 내심에서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부, 아내의 아무런 존재가치도 느끼지 않는 듯이 행동했고 자신으로 인해서 허물어져 가는 한가정의 혼란을 의식하려들지 않았다. 그녀의 어디에도 우리들의 엄마이고 한가정의 주부 아내라는 위치는 잊은지 오래였다.
그것은 곧 닥쳐올 파란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또 한 번 아버지나 우리형제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다. 9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동안 그래도 한 가족이란 인연으로 살았는데 그녀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가고 난 빈 자리에는 피멍으로 얼룩진 아버지의 회한과 우리형제들의 또 한 번 깊은 상처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신중하지 못했던 자신의 뼈아픈 경험으로 의기소침한 나날이 계속되었고 새로운 만남에 대한 경계로 쉬 마음을 열지 못했다. 혼자이신 아버지에게 동생은 자신의 장모님과 친구관계이던 분을 소개를 하기에 이르렀다. 자식들의 권유로 아버지는 또한번의 새로운 출발을 하기에 이르렀다. 남은 인생을 다시는 실패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로 두 분은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결심이 엿보였고 솔직한 표현으로 신뢰감이 두 분을 인연은 이어졌다. 그 분이 우리 어머니가 된지 올해로 꼭 이십년이 되었다. 처음 어머니를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새 어머니는 변함이 없다.
앞으로 남은 당신들의 여생은 서로 의탁하고 기대고 가려운 곳 긁어 주고 주름진 얼굴 마주보며 지나온 자신들의 모습에 반추되어 세월을 닦아가며 살아가지 않을까 한다. 한때는 아버지를 많이 미워 한 적도 있었다. 나는 나대로 아버지에 대한 의지나 믿음을 침묵 속에 묻어두었고 아버지 또한 표현하지 않는 과묵함과 담담함으로 자식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당신은 당신 산으로 나는 나의 나무로 푸르러갔다. 당신 앞에 고난이 올 때마다 그래도 주저앉지 않고 아버지의 자리를 잘 지켜주신 당신에게 한없는 애정을 전하며 감사하며 살고 싶다. 남은 생도 어머니와 서로 배려하고 의지하며 무탈하게 잘 살아주시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