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잠시 떠나있는 책꽂이엔
딸아이가 초등학교 때부터 즐겨 읽혀졌던 책들이 꽂혀져 있었다.
한국단편소설집과 만화로 된 역사책과 자연에 관심이 많아 서너 번은 읽었다는 파브르곤충기,
그리고 몇 달 전에 내가 읽어보라고 딸아이에게 건네 주었던
황대권님의 야생초편지가 정스럽게 나란히 꽂혀져 있었다.
나는 단편소설집과 야생초편지를 가게로 가지고 왔다.
점심시간 이후 한가할 때 야생초편지를 한 귀절 한 귀절 찬찬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근데, 두꺼운 책 사이에 뭔가가 끼워져 있었다. 책갈피인줄 알았더니 노랑색 메모지였다.
딸아이는 대학을 입학하기 전 겨울동안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 책을 나처럼 한가한 시간에 읽으면서 내게 쓴 낙서 같은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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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있잖아... 지금은 서늘한 기운이 도는 편의점 카운터 한쪽 의자에 앉아
불이 닿은 부분만 뜨겁다 못해 따끔 따끔대는 난로를 쬐며 책을 읽고 있었어.
펜을 잡고 편지를 쓰느라 손등 부분만 뜨겁게 달구어져
이따금씩 차가운 왼쪽 손으로 긁어 가며 말이야. 히히
책 제목은 야생초편지라고, 딱 엄마라는 느낌이 드는 책이야.
읽다보니까 갑자기 엄마생각이 나서 메모지에 줄을 찍찍 그어가면서 써내려가고 있는거야.
왜 엄마 생각이 났냐구? 책에 쑥부쟁이라는 말이 나오더라구, 엄마가 쑥부쟁이를 좋아하잖아.
엄마랑 많이 닮기도 했고.
서늘한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는 가을날 초록빛 노란빛이 어우러져 있는 가을 산에 피는
연보라빛 쑥부쟁이. 소박하고 수수해서 눈에 띄는 듯 안 띄는 듯하지만
어느 틈에 기억에 남아있는 꽃이잖아. 그래서 엄마가 더 많이 생각나나 봐.
조용조용하고 소박하지만 어느 사이 코끝에 그리움의 내음을 묻히고 가는 그런 꽃 같은 엄마가..
이렇게 편의점에 홀로 따분하게 앉아 있노라면 엄마와 둘이 앉아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나는 차 한 잔을 두고 수다를 떨던 방과 후의 오후가 생각나.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그런 점이 유난히 닮은 엄마와 난 그렇게 자주 수다를 떨곤 했잖아.
수다를 떨 때면 항상 느끼는 거지만 엄마랑 나랑 참 많이 닮은 거 같아.
사람들도 그러잖아 나랑 엄마랑 많이 비슷하게 생겼다고 물론 키 큰 엄마의 유전자를
못 물려 받은 게 억울하지마는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 말고도 감성이나 이런 것들이
참 많이 닮아 있어, 엄마랑 난 말이야... 엄마도 느끼지?
같이 수다를 떨 여자형제가 없어 외로운 엄말 위해 하나님이 엄마랑 친구도 돼주고
외로움도 덜어주라고 날 이렇게 엄마와 닮게 만드셨나봐.
**
딸아이의 편지는 미완성으로 끝나있었다.
중간 중간에 글귀가 맞지 않아 펜으로 좍좍 그으며,
글 이어짐이 어설프면 끼워 넣기를 하면서 낙서 식으로 쓴 편지였다.
딸아이는 고등학교 졸업 후 여백시간을 이용해 24시편의점 일을 두 달 정도 했었다.
가끔씩, 가뭄에 콩 나듯이 가끔씩...
엄마의 가게를 도와주다가 하루에 8시간씩 편의점을 일을 하면서
딸아이는 엄마가 얼만큼의 지루한 나날을 보내는지 알게 되었다고 했다.
손님들이 주는 스트레스가 얼마만한지를 딸아이는 보게 되었다면서
딸아이와 나는 만났다하면 손님들 흉을 보며 수다를 떨곤했었다.
딸아이는 나를 닮았다. 감정만 나와 똑같다.
혼날 일이 생기면 내가 야단을 치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려서
나도 따라 눈물이 나오는 우린 닮은꼴 모녀지간이다.
외모는 정확히 닮은 편이 아니다. 처음 본 느낌은 닮았다고 하는데 그러하지가 않다.
딸아이는 마르지 않았다. 그리고 키도 크지 않다.
나는 마르고 팔다리가 길어서 외할머니께서 외할머니네 안방에서 나를 받으면서
에구~~ 팔다리가 길기도 해라 여자가 길면 게으르다는데 하셨단다.
딸아이는 쌍꺼풀이 정확하고 눈이 크다. 성형했냐고 의심할 정도로 알맞게 코가 오똑하다.
나는 속 쌍꺼풀이 있는 보통 크기의 눈을 가졌다.
내 바로 밑에 남동생 눈은 호수로 비유하는 큰 눈을 가졌었다.
어릴적부터 사람들이 나와 남동생 눈과 바뀌어졌으면 얼마나 예뻤겠냐고 했었다.
본인이나 날 낳으신 엄마는 아쉬운점이 없었는데, 왜 남들이 그렇게 아쉬워들 하는지 원...
그래서 난 내 눈이 못생겼다고 믿었고, 그게 내 외모의 큰 단점이라고 받아 들이고 있었다.
근데 중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려고 하는데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주면서
학생증을 확인하던 선배 언니가 내 눈을 보더니 눈이 참 맑고 예쁘다고 했다.
난 놀래서는 네? 하고 반문을 했더니 “눈이 참 예쁘네.” 믿어지지 않던 그날,
거울 앞에 늘어 붙어서는 눈을 아래로 떴다 위로 떴다
옆으로 봤다 째려봤다 거울은 지겹고 피곤했다.
그러니까 딸아이 눈은 내가 소원하던 남동생 눈을 꼭 닮아 있는 것이다.
난 코도 딸아이처럼 그리 오똑하지 않다.
코 아랫부분에서 살짝 휘어져서 옆으로 보면 매부리코 같다.
아버지 형제들 코가 다 내 코와 똑같다.
윗부분은 날이 섰는데 아랫부분에서 날이 조금 휘어졌다.
내가 감동을 받았던 책이란 것은, 책뿐만이 아니고 무슨 일에서든 그렇겠지만
한번 읽었을 때 못 느꼈던 감동이 가슴 저기 아래까지 훑곤한다.
이럴 때 손님이 오셔도 금방 일어나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엉덩이로 인사를 하면
단골손님은 뭔 책이 그리 재미있어요 하고 관심을 갖고 물어본다.
“네..제가 우리나라꽃에 관심이 많아서요.”
“돈도 버시고 꽃도 좋아하시고 행복해 보여요.”
그러게 난 행복한가보다.
하긴 행복이 별스러운 건 아니지 내 사는 모양이 별스러울 뿐이지...
노랑색 메모장에 쓴 딸아이의 낙서편지는 책갈피로 쓰고 있다.
우표도 부치지 않았고 주소도 쓰지 않아서
사라졌을지도 모를 편지가 편지 스스로 주인을 찾아 왔다.
이런 사소하고 우연한 일에서 난 행복한 엄마다.
기숙사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딸아이한테 며칠동안 전화를 안했더니
딸아이한테 먼저 전화가 왔다.
엄마는 내가 보고 싶지도 않은가봐 하면서...
책 속에 껴있던 낙서편지를 몇 번이나 읽어보고 전화를 할까하다가
이렇게 글로 남긴다는 걸 딸아이는 나중에 알게 되겠지.
편지가 내 곁으로 찾아왔듯이... 이 글도 언젠가는 딸아이에게 읽혀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