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왜 갑자기 그 사람이 생각났을까?
눈송이처럼 하얀 꽃잎이 끝없이 펼쳐진 그 길에 들어서자 마자
달콤한 꽃내에 취해 순간 몽롱한 기운이 들어선가?
내가 그 사람을 만나건 한여름 이었던것 같은데..
갑자기 대타로 끌려나간 소개팅 자리..
어두컴컴한 음악다방안에서
얼굴 채 익히기도 전에
성급히 내 손목 끌고 자기 아르바이트 하는 화실로 무작정 가자 하던 사람
훤칠하니 큰 키에
꽤 보기좋아 뵈던 얼굴
자신감 넘치던 말투
너무 넘쳐 잠깐 마음 상해했지만
엉겁결에 가게된 화실에서
후배들 만나 형수님 이라며 인사 하라하고
기막혀 하는 내 표정에 눈 꿈쩍이며 동의를 구하는 그 모습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예..뭐..그냥요..."
집이 바로 옆인데 잠깐 집에 들렀다 가자는
더 황당한 요구에
눈 동그랗게 뜨고 "아니예요..저 그만 가볼께요."
"괜찮아요..울엄마 집에 계세요..잠깐요..전화해서 바꿔줄께요."
헉..
내가 뭐라 그럴새도 없이 전화해선 "엄마 며느리 됄고간다..맛있는것 해놔.잠시만 바꿔줄께.'
"어여와..내가 부침개 해줄께..괜찮어. 그 녀석이 맨날 데리고 온다 하드만 오늘은 얼굴 보네..어여와.."
이게 무슨 도깨비 장난도 아니고..
귀신에 홀린것도 아니고..
또 다시 그 손에 이끌려 집에까지 갔다..
사람 좋아 뵈는 미소 지으시며 반갑게 맞아주시던 그의 어머니는
"에구..그렇게 안보여 주더만 니가 왠일이니? 야무지게 생겼네..이 녀석은 덜렁바윈데 잘됐네..자그마니 귀여워서 주머니에 넣어다니면 쓰겠다..허허허.."
너무 갑자기 일이 진행되어
그냥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린것 외엔
무슨말을 나눴는지..
부침개 맛이 어땠는지..
무슨 꿈결처럼 시간이 흘러가 버린것 같다..
그렇게 긴 시간 머물러 있지는 않은것 같은데
내겐 진땀나는 시간이 었고
위속으로 억지로 밀어넣은 부침개 조각들이 하나 하나 곤두서고 있었다.
처음이니 그만 데려가겠노라 너스레 떠는 그가
순간 너무 고마웠고 비로소 내가 지금 어디에 와있는지 정신이 들어
주위를 잠깐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정갈하니 깔끔하게 치워져 있던 거실이며
여기저기 그의 작품인듯 보이는 유화며 수채화..
갖가지 조각들...
집밖엘 나와서야 내 얼굴이 얼마나 상기되어 있었는지 느꼈으니
후끈후끈 달아올라 진땀까지 뻘뻘 솟구쳤다..
"미안해요...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해서.."
"저 집에 갈래요.."
너무 당황한 나는 아무 생각도 할수 없었고
그냥 황당하고 기막히고..
어디가서 잠깐 차 한잔 하고 가자는 그의 부탁을
정신차려 이번엔 매몰차게 거절하고
거의 울듯한 얼굴이 되어 "저 갈래요..보내주세요.."
이번엔 그가 당황했다..
"나 나쁜 사람 아닌데...그냥 **씨가 내 사람이라는 느낌이 확 와서
빨리 인사 시키고 소문 내야 어디로 도망 못갈것 같아서..미안해요..근데 나 진짜 나쁜 사람 아닌데..물어봐요..소개해준 사람한테.."
나는 듣는둥 마는둥 정신없이 택시 잡아타고 집으로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언제 나를 봤다고..
보자마자 형수라 인사 시키고 며느리감이라 소개하고..
허..기막혀..
내가 귀신에 홀리지 않고서야..
친구에게 전화해 따졌다..
뭐 그런 사람이 다 있냐고..나 그집에 가 인사까지 하고 왔다고..
한참을 웃던 친구는
"그 형 어떻게 했는지 눈에 선하네..니가 단단히 맘에 들었나보다..
야..그 형 괜찮어..그냥 계속 만나봐..집안도 좋고..그 형 실력도 인정받아..
군대 갔다 왔으니 졸업하면 아마 바로 장가가야 할걸? 아들 하나라 집에서 서두른다 하드만..우리과에서 젤로 인기 많은 형이야.."
"야..내 나이가 몇인데..결혼타령이니? 얘가 진짜 미쳤어..
그리구 내 타입 아니야..너무 느끼해..나이 차이도 많고..글구 나는 예술 하는 사람 절대 노땡큐여..노땡큐!"
한동안을 중간에서 친구가 다리품을 팔았다..
전화요금도 만만찬케 나왔을거다..
다시는 보구싶어 하지 않는 나와
어떻게든 만나고 싶어하던 그 사람 사이에서
흡사 숨바꼭질 하듯 우리는 이리 돌고 저리 돌고..
졸업반이라 작품때문에 정신없었던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암튼 숨고 찾아다니고 하는 사이에 시간은 흘렀고
그 사람과의 인연은 거기에서 끝인가했다..
가끔 친구 통해 그 사람 소식 들었지만
못들을 소리라도 들은듯 호들갑을 떨어대니
친구도 입 다물어 버리고 그렇게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
허..
그런데 사람의 인연이라는게 그리 쉽게 끝맺지는 못하나보다..
몇년전인가?
아이 초등3학년 일때이니까..
그 당시 아이와 인사동을 참 열심히 돌아다녔다..
시간 날때마다 전시회도 가고 옛물건도 감상하고
신랑과 데이트 할때 자주 찾던 경인미술관도 가고
특히나 신인들의 작품을 좋아하던 나는 낯선 이름의 전시회만 있으면
열심히 다리품을 팔며 다녔다..
아마 노란국화가 우아함을 뽐내는 가을쯤 이었던것 같다..
가을볕이 따사롭게 내려쬐던 휴일에
아이 손 붙잡고 들어선 어느 조그만 화랑에서
왠지 낯이 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몇점 되지 않는 작품을 둘러본후 작가소개가 되어있는 작품집을 훝어보는데
아무래도 낯이 많이 익은 얼굴이다..
세월의 풍상을 입은 듯 조금은 추레해 보이는 모습에서
누군가의 이미지가 자꾸 겹쳐졌다..
설마..아니겠지..그럴리가..
고개 갸우뚱 거리며 아이 손 꼭 붙잡고 나서는 내 앞에
지친 미소 띠며 들어서는 사람은...
맞다..
그런데...모습이..
얼른 고개 돌려 밖으로 튕기듯 걸어 나왔다..
뒤에선 그의 힘없는 웃음소리가 비집고 나왓고..
혹여 알아봤을 까봐
서둘러 서둘러 정신없이 걸었다..
"엄마 왜 그래? 갑자기 바쁜일 있어?"
의아해 하는 아이에게 대꾸 한마디 없이
황급히 집에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가 출발을 하는 순간 참았던 쉼호흡 크게 내뱉고
찬찬히 다시 작품집을 봤다..
이번엔 그 작가의 이력부터 훝었다..
맞네..그 사람이네..
다시 그 모습을 봤다..
어찌 살았기에 이리 얼굴이 상했을까? 그 준수하던 모습이
그 사람이 머리숱이 이리 없었나? 사진임에도 그 동안의 살아온 세월이 녹녹치 않았음이 고스란히 들어났다..
사는곳은?
음..그리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사는군..
민족해방 운운하는 단체 소속이군..
대충 머리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지쳐 보이던 그 모습에
당당하고 거침없었던 옛날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
묘한 그림이 그려졌다..
그 사람도 나를 알아봤을까?
거울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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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머리에 까만 눈동자의 또롱또롱하던 소녀는 어디로 가고
한껏 멋부린 염색된 머리에
예쁜 색깔로 덧입혀진 퀭한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왜 갑자기 그가 생각났나 모르겠다..
햇살이 너무 고와서?
잘디잔 흰꽃의 달큰한 향내가 너무 강해서?
그저 황당했던 여름날의 추억 정도로만 남아있던 사람인데
아니다..
남아있지도 않은 사람이다..
잠시 스쳐간 인연이 되어 지나쳐 버린 사람인데.
눈이 부신 봄햇살이 내 마음을 잠시 어지럽히고 간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