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끝자락
분분히 날리는 벚꽃 터널 지나
밤별 주우러 떠난 길.
속절없이 비가 내린다.
살면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몇 번의 여행을 떠나곤 했지만
언제나 책임을 인위로 한 기회였기에 늘 심신이 지치곤 했었다.
때문에 친족의 화합을 위한 계모임의 명목이었지만
등이 가벼운 길은 발걸음부터 사뭇 달랐다.
더우기 봄이 오롯이 부서져내리는 설레는 벚꽃나들이 였기에.
그러나, 때맞추어 오는 비로 하여 다소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듬성듬성 별이 박혀있던 도시의 밤하늘만 보다가
오래된 기억속의 별밭을 주으려던 기대감이 여지없이 깨졌지만
그런대로 차 창 밖으로 젖어 있는 봄의 정경이
또한 그대로의 새로운 흥취를 불러일으켰다.
앞서 달리는 차들의 지붕 위에
약속처럼 점점이 하얀 꽃잎들이 덮히고
노면 위로 젖은 눈빛을 하고 떨어지는 봄꽃들이
내 그리움의 빛깔인 듯 촉촉하게 가슴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일행 중의 고향인 남해 남단,
별장처럼 이쁜 집에 여장을 풀고
정담들을 숟가락질 하기에 바쁜 밤이 숨가쁘게 깊어갔다.
어딜가나 아내들은 남편들의 뒷치닥 거리에 자신은 뒷전이지만
여행지에서만은 예외로 남편들의 선선한 배려가 이어진다.
서툰 솜씨로 부엌에서 덜그럭거리며 설거지를 하고
모처럼 주부의 일에서 해방된 여인들은
창가에 모여앉아 아쉬운 밤바라기를 하다가,
예전 어린시절의 추억을 하나하나 줍다가,
남편들의 흉이며, 자식얘기들을 펼치기도 하다가..
그렇게 여독에 지쳐 하나, 둘 단잠에 빠져 들었다.
모두가 잠이 든 깊은 밤.
적요만이 밤을 채우고 창 밖엔 빗소리만 가득했다.
이렇듯 가깝게 빗소리를 곁에 두었던 적이 언제였을까.
아주 어렸을 적 처마 밑 낙수물 떨어지는 소리에
봉당밑에 반가운 누군가가 들어선 듯 설레며 귀를 쫑긋대던
그 아슴한 안개같은 기억이 달려든다.
그런 날이면 조금씩 잎사귀를 내밀던 나무들이
목축이며 키를 키우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리는 듯하고
재 너머 내 키만하던 푸른 보리물결이 쌉싸릅한 목청을 돋구고
이내 달려와 문 밖에서 내내 재잘거리며 머물렀다.
밤새 잠 안자고 그들의 내밀한 소리를 엿듣느라 옴짝거리다 보면
한 숨 달게 주무시다 선잠 깬 엄마는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귀신한테 정신 팔아먹을 년'이라고 애먼 소리로 야단이셨다.
그 때의 그 아늑한 정서는 아니어도
통유리 가득 집 앞 너른 들을 온통 채웠던 마늘 순과
옛날의 내 감성처럼 일렁이는 보리밭을 불러다 창문에 걸어놓고
총총한 별빛을 채우리라 챙겨갔던 마음 속 바구니에
그들의 푸른 속삭임을 꼭꼭 눌러담았다.
물론, 모습이 드러나지 않은 총총한 별밭과 은은한 달빛도.
그 한 쪽 옆에
굳이 부탁하지 않았어도 살그머니 다가와 앉아 주던
복사빛 촉촉한 눈매의 벚꽃들과 목련의 희디 흰 속살.
내 안에서 잠자고 있던 감성이
일제히 섬세한 촉수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던 남해의 밤은
나를 또 하나의 길로 나서는 촉매제가 되었다.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외출을 한다.
일상의 필요로 인해,
자신의 내면 충족을 위해,
가족의 화목을 다지고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그 많은 외출의 명분이
어떤 이유로든 자신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자리했으면 싶다.
남해의 끝자락에서 나는
내 평생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감수할 새로운 숙제를 마련했다.
오랜동안 '내 길은 아니라' 고 밀쳐두었던 글쓰기에의 새로운 도전이다.
물결치면서 몸을 살찌우는 보리밭의 발돋음처럼,
햇살에 몸 비비며 제 키를 높여 가는 마늘 순의 그 씩씩한 발돋음처럼,
내 푸른 보리밭의 노래가 당당한 옷을 입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