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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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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같은 미세함도 나에겐 태풍이려니..


BY 그린미 2005-04-09

남편의 앓는 소리에 눈을 떴다. 창을 통해서 들어온 가로등 불빛에 드러난 시계가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내 옆에서 배를 쥐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남편의 입에선 쉴새없이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난 퉁기듯이 일어났다. 가슴이 와르르 와르르 바윗돌 구르는 소리를 냈다.

"왜 그래요?...어디가 아파요?"

웬만한 통증은 그냥 속으로 삭히는 남편의 인내심을 알기에 내 불안감은 배로 늘어났다.

"배가....배가...죽을 것 같아.........왜 이러지?......."

불을 켜고 웅크린 남편의 얼굴을 보니 할로겐 불빛 탓인지 희다 못해 푸른빛이 돌았다.

땀으로 뒤범벅된 머리칼이 얼굴을 덮었고, 고통에 이지러진 입 자위가 심하게 떨렸다.

 잠귀가 별로 어둡지 않은 내가 눈치를 못 채고 있을 정도로 남편은 혼자서 해결해 보려고 했던 것 같았다. 그의 이부자리가 심하게 헝클려져 있는걸 보니 오랜 시간 애를 쓴 게 분명했다.

 미련스럽게 옆에 사람을 두고 혼자 끙끙댄 게 못내 미안하고 속이 상했다.

119를 부를려고 했지만 아직은 견딜 만 하다는 남편이 화장실로 가는 즉시  토악질하는 소리를 냈다.

혹시 식중독이 아닐까 의심을 해 봤다. 저녁 메뉴가 맘에 걸린다.

군만두로 대충 떼우자는 소리에 반길 듯이 구워다 준 게 화근인 것 같았다.

밥상 차리기가 귀찮아서 이런저런 구실로 남편을 꼬드겼더니.........

냉동실 문을 열고 6개월이나 남아 있는 냉동만두의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보니 달리 의심이 갈 데도 없고..

차라리 식중독 같이 겉으로 드러난 병 같으면 별로 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러면 혹시 다른 병이라도???......

 

 5년 전에 대수술 받은 남편의 건강에 조금이라도 이상 징후가 보이면 번번이 가슴부터 내려앉는 건 그 날의 충격이 여지껏 꼬리를 물고 있기 때문이었다.

 15kg나 줄어든 남편의 체중은 항상 내 불안감에 돌덩이 하나를 더 얹는데 일조를 했다.

 본래의 체중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을 여러 각도로 추리 해 봐도 내 상식 밖의 일이어서 그런지 도무지 지피는 데가 없는 상태에서 감기라도 앓으면 과대 망상에 빠지는 덫에 스스로 걸려들어야 했다.

 이 사람이 쓰러지면 나하고 애들을 어떡하나.....

쓰러진 남편보다도 남아 있는 나와 아이들 걱정이 더 앞선 이기심으로 남편이 퇴원한 후에도 미안한 맘이 들어서 내내 자중하고 반성하며 살았었다.

 그 날도 그랬다.

 암 선고를 받고 불안해하는 남편에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거짓말이 남편에게 최면을 걸었었다. 어쩌면 내가 나 자신이게 건 주술인지도 모른다.

"울 엄마가 내 사주를 보니 과부는 안 된다고 그러던데요..........."

내 사주를 본 적도 없는 엄마 얘기를 사실인양 떠 벌렸을 때 남편은 곧이곧대로 믿었나 부다.

7시간의 대수술을 마치고 회복실로 옮겨져 마취가 덜 깬 상태에서 남편은 최면에 걸린 소리를 했다.

 " 자네... 과부.. 안.. 만들려면.........내가.. 살아야....... 겠지.........."

 그래서 살아난 남편은 5년 동안 별다른 병치레 안하고 잘 견뎌 왔다.

 

 1시간 이상을 설사와 복통을 번갈아 하면서 뒹굴던 남편의 배에 쑥 찜 팩을 올려놓고 따뜻한 보리차를 입에 흘려 넣었다.

 이 쑥 찜 팩은 통증을 완화 시켜주는 효과가 있어서 비상으로 준비해둔 상비약의 일종이다.

 불규칙하게 오르내리던 숨결이 차차 고르게 터지면서 남편은 잠이 든 것 같았다.

 잠들기 전 남편은 자기 때문에 잠을 설친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내 손을 꼬옥 쥐었다.

 "당신 남 이유?.."

 이 상황에서도 난 여유를 가지고 싶어서 남편의 말을 중간에서  토막내고 남편이 잠든 걸 확인한 뒤  주방으로 갔다.

 찹쌀을 믹서기에 곱게 갈고 다시마와 멸치 그리고 표고를 섞어서 달여놓은 국물을 붓고 미음을 끓여 놓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곧바로 허한 속을 채워 주어야 몸에 풀기를 잃지 않을 것 같았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니 잠은 멀리 달아나고 이상하게 속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린 뒤끝은 항상 온몸의 진기를 다 빼 버린다.

 심신을 진정 시킬려고 따뜻한 녹차를 한잔 탔다.

 낮에 고쳐다 놓은 카세트에다가 이어폰을 꽂고 불교 명상음악과 법문을 들었다.

 마음이 어지럽고 축이 흔들릴 때 항상 옆에 두고 의지를 하는 나만의 독특한 심신 치료법이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 것이며,

 세상살이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 것이며,

 일을 꾀하되 쉽게 되지를 말 것이며,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하길 바라지 말 것이며......

 말 것이며...말 것이며....말 것이며.....

 하라는 말 보다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이  더 많은 寶王三昧論이다.

 

 만사에 유약하고 피동적이라는 거 항상 염두에 두고 살만큼 난 야무지거나 적극적이질 못하다.

 남들은 나를 보고 차돌같이 단단하고 딱 부러진다고들 하지만 내면은 들여다보는 내 관점은 쥐면 부스러지는 부석 돌이며 구멍 뚫린 현무암같이 실속 없는 헛 똑똑이 에 불과 하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면서 산 게 반세기이다.

 조그마한 충격에도 홍역을 앓을 만큼 난 면역성이 결핍되어 있는가 하면 한번 다친 정신적인 상처는 쉬이 치료가 안 되는 약골이기도 하다.

 지극히 의존적이며 주변 상황에는 물결에 흔들리는 수초 같이 매가리가 없다. 축을 고정시켜서 대칭을 유지해야 하는 중립적인 자세를 은연중에 놓쳐 버린 게 다반사였다.

한쪽을 누르면 한쪽이 튀어 오르게 되어 있는 '풍선현상'보다는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을 '양비론'을 상실한 채 한쪽으로 기우는 비대칭에 가끔씩 화를 입기도 했다.

 

 내 옆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어서 나를 지탱해 주고 나를 지켜 주어야만 했다.

 나를 지탱해 주는 사람은 오로지 남편 밖에 없다는 사실을 주지하며 산 것도 내가 능동적이지 못한데서 오는 결과론이다.

 남편이 무너지면 나도 아이들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도미노 현상을 겁내고 있었기에 남편의 숨소리 하나에도 촉각을 곤두세우는 나의 이기적인 생각과 남편의 부재가 몰고 올 파장이 무서워서 난 남편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양새를 보이는 내가 싫을 때가 많았다.

 이제는 사랑하는 맘보다도 측은한 맘이 앞선다.

 깃털이 움직이는 미세한 흔들림일지라도 나에겐 태풍보다도 더 큰 회오리로 다가와서 나를 위협하기도 한다.

 쓰나미에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는데, 지나고 보면 신체적인 사소한 리듬 파괴에 불과한 복통에도 가슴을 쓸어 내리며 운명을 점쳐야 하는 소심한 내 소견머리가 참으로 부끄럽다.

 더 큰 불행, 더 큰 회오리가 나를 덮친다면 나는 소롯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불안감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달라붙는다.

묵혀온 세월만큼이나 만사에 대범해지고 넉넉해 져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점점 줄어들기만 하는 오그라진 가슴은 펴 질 줄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