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신랑은, 운동신경은 누구보다 둔한데다 책만 파는 범생이 같은 성격의 내가 축구나 야구, 탁구 그 밖의 모든 스포츠에 골고루 열광한다는 사실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여자들은 스포츠를 싫어한다는 일반적인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신랑은 마누라와 함께 스포츠를 감상하는 기분을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2002년 월드컵 경기는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그때가 태어나서 가장 감정의 짜릿한 맛을 본 순간이 아닐까 싶다. 처음 1승을 올리던 날, 신랑도 나도 함께 축하주를 마셨다.
하지만 16강전, 8강전, 드디어 꿈의 4강전까지.... 긴장이 날로 고조됨에 따라 마누라 상태도 약간 이성을 잃어간다고 느꼈던지 신랑은 함께 열광하던 입장을 거두어들이고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다.
축구란 게 우리팀이 한골 넣을 때나, 아깝게 노골이 되었을 때, 또 상대팀이 한골 넣었을 때, 매순간 소리지를 일이 생긴다. 그래서 발악에 가깝게 소리를 질러댄다. 내가 소리지르며 기뻐하면 아이들도 영문을 모른 채 골! 골! 하며 같이 날뛰어 준다.
그런데 정작 신랑은 그런 나 보란 듯이 경기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묵념하는 사람처럼 한번도 입을 떼지 않았다. 독한 사람같으니라구. 이런 기회에 스트레스 좀 풀지? 하는 내 말에 이미 내가 자기 몫까지 다 질러대서 할 맘이 없단다.
나는 자기랑 그 경기 같이 볼려고 바쁜 일도 팽개치고 집으로 달려온거였는데...
요즘은 2006년 독일 월드컵 예선으로 한바탕 떠들썩하다.
그런 빅경기가 있는 날이면 신랑은 이제 먼저 알아서 모든 일상사를 처리한다.
경기 끝날 때까지는 누가 굶어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할 여자란 걸 이미 체득한 지라 스스로 애들 저녁을 지어 먹이고 치운다.
오만방자한 나는 차려다주는 밥상도 경기 보는 데 방해된다며 나가서 먹으라고 할 정도다.
왜 이렇게 축구에 열광하는 지 가끔 나도 궁금하다.
그리고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어느 날부터 팬이 되어 있었다. 팬이라고 해서 경기장을 직접 찾아다니거나 국내 프로 축구 경기를 줄줄이 다 꿰고 있지도 않다.
다만, 국가대표 경기는 빠지지 않고 본다. 국가대표란 건 그 나라에서 내노라하는 선수들만 뽑아서 나라의 이름을 걸고 하는 경기다. 거액의 돈을 받고 외국에서 프로로 뛰는 선수들도 국가대항전 때는 당연히 우리팀으로 복귀한다.
그들은 개인의 영광과 나라의 명예를 위해 열심히 뛴다. 축구는 혼자 아무리 잘났어도 팀웍이 없으면 안된다.
공격수, 수비수 다들 자기 자리를 지키며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낼 때 멋진 경기가 펼쳐진다.
최전방 공격수가 골을 넣었어도 난 그 선수만을 칭찬하지 않는다.
그 골이 들어가기까지 절묘하게 골을 연결해준 두세 명의 동료선수가 분명 있으므로 그들도 같이 칭찬한다. 골이 들어간 장면은 반드시 다시 한번 보여주는데 그때 자세히 보라.
골이 들어가는 장면보다도 연결해주는 장면이 더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한 선수가 열심히 치고 들어간다, 최전방 공격수는 그가 어디쯤에서 자신에게 공을 줄것인지를 계산하고 먼저 뛰어들어가서 기다린다. 상대팀은 또 상대팀대로 얘네들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를 계산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 막는다.
초원을 달리는 야성의 맹수들이다. 그들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치고 달린다. 아, 이번에 들어가겠다.... 아니다.... 수많은 느낌들이 교차할 것이다. 결국 골이 그물에 출렁이는 그 순간까지 양팀 선수들은 죽을 힘을 다한다.
전후반 90분 동안의 팽팽한 긴장감을 뚫고 마침내 골을 넣었을 때의 환희야 이루 말할 수 없다. 선수와 관객들이 하나가 되어 기쁨의 환호성을 지른다. 그들의 기쁨 뒤로 골을 허용한 팀 선수가 고개를 떨구는 장면이 얼핏 보인다. 그들이 맛보는 한 순간의 좌절을 난 더 안타깝게 본다. 저들은 단 몇 초 만에 희비의 엄청난 차이를 맛보는 것이다.
그때 받는 스트레스의 양은 정말 엄청날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스트레스에 질식해 죽지 않고 여전히 매번 씩씩하게 경기를 하는 것은 그 희비가 항상 엇갈려서 온다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질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고 그래서 경기는 계속되는 것이다.
난 어떤 특정한 축구 스타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안정환이나 홍명보 황선홍 등은 2002년 월드컵 4강을 이루었을 때 너무 주목을 받아서 오히려 그때 충실한 수비수 역할을 했던 김태영이나 비운의 주인공 이을용이 좋았다.
이영표나 송종국 박지성 등도 튀지않으면서 묵묵히 자기 역할을 다하는 선수들이라 좋다.
축구의 세세한 생동감을 제대로 맛보려면 경기장보다 텔레비젼이 더 낫지 않나 싶다.
카메라는 그 장면을 자세히 보여준다. 공 하나를 놓고 사투를 벌이는 남자들의 생생한 심장박동 소리가 거기 있다. 대퇴부를 비롯한 근육 하나하나가 살아서 움직인다.
국가대표가 되려면 강인한 체력은 기본이요, 타고난 동물적인 감각에, 피나는 훈련과정과 개인의 노력, 또 그들을 뒷바라지하는 가족들의 사랑이 모두 모아져야 한다.
그런 한사람 한사람이 모여 벌이는 경기다. 그 옛날 로마에서 벌어진 검투사들의 싸움만이 남성적이라고 누가 말할 것인가.
축구는 현대에 남은 가장 남성적이고 야성적인 스포츠 중 하나가 분명하다.
아무 장비도 없이 넓은 운동장에 달랑 공 하나 가지고 몇 만 명의 관객을 환호하게 만들기가 그리 쉬운 일인가.
이제 내년이면 2006년 독일 월드컵이다.
세계의 축구 지존들이 다 모인다. 지구촌의 축제다.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어쩔 수 없는 실력의 벽이나 설움도 있지만 어쨌건 인류 최대의 잔치 임은 분명하다. 자기 나라가 출전하지 않았어도 월드컵 결승전 때의 엄청난 시청률을 보면 알 수 있다.
벌써 마음이 설레고 그 날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