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동생의 대학졸업과 막내 남동생의 고교졸업식이 하루에 있던날
저녁을 먹기전에 가족사진을 찍었다.
우리집 첫 정식 가족사진.
내 대학 졸업식날 가족사진을 찍자고 소원하던 엄마의 청이
온 가족의 시큰둥한 반응으로 무산된지 2년 뒤에 찍은 사진이다.
그때만 해도 환갑잔치때나 교복처럼 똑같은 한복 맞춰 입고 가족사진을 찍거나
좀 여유있는 사람들이 가족사진을 찍었었다.
2년 사이에 우리집이 퍽이나 경제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마루에 쓸데없이(?) 큰 가족사진을 걸어놓은 집이
주변에 조금씩 많아지기 시작하데다가
내가 좀 이른 결혼으로 집을 떠나고 나니
모두들 그런 것도 한번 찍어볼만 하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사진관 아저씨가 호박에 줄을 그어 수박을 만드셨는지
내가 보아도 꽤 젊잖은 작품이 우리집 마루에 걸리게 되었다.
우리가 결혼 사진을 찍었던 집이라
서비스로 작은 사진 하나를 액자처리하여
신혼인 우리에게도 주신 덕에 피아노 위에 올려 놓으니
가끔씩 들여다 보며 친정가족 생각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부산에서 올라온 동서와 함께 우리집에 드르신 시어머님이
사진을 보시고 서운한 기색이 역력하셨다.
어찌하랴
사돈집이 형편이 쪼~끔 나으니
게다가 타고난 인물 좋은 큰아들이 어찌나 잘나왔는가
자존심 하나에 사시는 어머님은
야가 잘 나왔구나
모기소리만하게 말씀하셨다.
한 5~6년 지나면서 시부모님 두분 환갑이 다 지났다.
잘난 남편들 덕에 고생에 찌든 며느리들은
교복같은 한복은 고사하고 시집 올 때 해 입은 새색시 한복을 입고
조촐한 가족 잔치를 치루었다.
다른 것 못 해드리고 40%세일에 백만원하는 토끼털 안감이 대어진
지금은 이름도 잊은 무슨 무슨 코트 한벌을 해드렸다.
가난하게 자라 가난한 집으로 시집 온 동서들은 몰래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환갑을 보내고 나서 한달에 두세번 찾아 뵐 때면
듣는 말이 '뭣 같이 치룬 환갑'이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함께 살고 있던 막내 동서의 얼굴은 늘 어두웠다.
그러던 어느 주말 저녁을 해먹고 앉아있는데
어머님께서 슬며시 환갑에도 못찍은 가족사진을 찍고싶다 하셨다.
하루 아침에 남편 월급 절반이 날아가게 생겼으니
난 그러세요 하면서도 속이 쓰렸다.
남편과 아버님이 무슨 사진은 하며 무안을 주었다.
갑자기 어머님이 파르르 떠시며
(어머님이 파르르하시면 가족들 숨소리가 달라진다)
'난 남의 집에 가서 가족사진 보면 젤로 스트레스 받아'
기분이 상해 집으로 오던 효자 아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그게 그렇게 파르르하실 일이야'
그러게 하고 맞장구 칠 수도 없고.
난 열심히 생각을 했다
'내다' 하시는 전화 목소리 톤만 가지고도 기분을 알아차리는
과도 예민증에 걸려 있는 나도 당황스러웠다.
뭐 어째건 그 여파로 한 2년이 못되어 집안에 다른 잔치가 있어
다 모인 날 가족사진을 찍었다.
가보니 평소 미용실에 일년가야 한두번 가는 동서들이 미용실에서
드라이를 하고 결혼 때 해 입은 투피스를 입고 와 있었다.
난 일년 전 생일에 친정엄마와 동생이 해 준 검정 바지 정장에
브로치로 간단히 포인트를 주고 늘 내가 하던 홈매이드
헤어스타일 그대로였다.
흠 이 동서들이 언질을 좀 주던지 말이야.
뭐 어째든 어머님은 중간에 옷까지 갈아 입으며 신이 나게 찍으셨다.
나중에 O씨만 한장 찍자는 말씀에 그들끼리 모이고
고모부는 기가막힌 표정으로 우리의 동조를 청했으나
마음 고된 시집살이에 그런 것 즈음은 웃고 넘어가는
여자들이라 돌아다니는 아이들이나 바라 볼 뿐이었다.
그제사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으니
어머님이 파르르 떨며 말씀하신 남의 집이 바로 우리 집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