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아질산염 보존제 우리라나에서도 금지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583

비가 온다, 비가...


BY 낸시 2005-03-02

비가 온다.
이른 새벽 혼자 깨어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소리가 반갑다.
하늘이 속상했던 날 위로해 주나보다고 생각한다.
훨훨 씻어 버려야지, 까짓것 또 훔쳐 가려면 가라지 뭐...너그러운 마음이 된다.
며칠 아까운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마음 한구석에 싸아한 아픔이 있었는데...

 

요즘 우리는 꽃밭 만드는 일에 바쁘다.
다섯 군데 조그만 꽃밭이 완성되고, 오는이 가는이 마다 발길을 멈추고 들여다보고 칭찬하고, 우리가 봐도 너무 신기할 만큼 이쁘고, 지린내가 진동하던 곳에 냄새도 없어지고(홈리스들이 소변보는 장소를 옮겼다고 한다. 이쁜 곳에  실례하기 차마 민망해서였는지)... 너무 좋아서 우리는 내년에 하기로 했던 여섯번 째 꽃밭에 도전했다.
이미 만들었던 꽃밭보다 면적이 넓어 망설여지던 곳이다.
돈도 많이 들 것 같고, 힘에도 부칠 것 같고... 그래도 욕심이 앞서 일을 저질렀다.
먼저 잔디와 잡초를 걷어내는 일이 우선이다.
이곳 텍사스엔 벌써 봄이 왔다.
마음이 바빳다.
날이 갈수록 나무에 도는 초록 기운이 짙어지는 때문이다.
꽃과 나무를 심는 사람은 때를 놓치면 안된다.
더구나 여기처럼 태양이 강열한 곳은 더욱 그렇다.
조금만 늦어지면 옮겨심은 꽃도 나무도 강한 햇빛 때문에 몸살을 심하게 겪거나, 아니면 아예 살아나기 힘들다.
남편과 내가 꽃밭 만드는 일에 밤이 늦도록 매달려 있을 때가 있는 것도 그래서다.
열심히 서둘렀지만 지난 주에 끝내고 싶었던 부분을 끝내지 못하고 비가 왔다.
비오는 동안 집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꽃밭에 가 있었다.
어서 비가 그쳐야 할텐데...


일요일 아침부터 비가 그치고 다시 화창한 봄기운이 곳곳에 넘쳤다.
교회가는 길에 마음은 자꾸 우리가 만드는 꽃밭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행여, 남편이 내 마음을 눈치 챌까봐...
오후엔 소그룹 모임이 우리집에서 있는 날이라 음식하고 청소하느라 꼼짝을 못했다.
마음은 초조하기만 하였는데...
드디어 월요일 꽃과 나무와 거름을 사서 차에 가득 싣고 꽃밭을 향해가는 마음은 뿌듯했다.
머리속엔 벌써부터 활짝 핀 꽃들과 다 자라 우거진 나무들이 연출할 풍경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어, 저기가 왜 또 저러지?"
남편이 가리키는 곳엔 흙이 파헤쳐져 있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또 파 갔구나...'
지난번에도 나무 한 그루을 누군가 훔쳐갔었다.
제일 눈에 띄는 나무로... 돈을 좀 더 주고 산 나무로... 중앙에  액센트로 심어 둔 나무였는데...
그 나무가 빠진 곳은 마치 완성된 용의 그림에 눈알이 빠진 것처럼 허전하였다.
그래도 같은 나무를 또 심을 수가 없었다.
같은 나무를 구하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눈에 띄는 나무라면 누군가 또 퍼 갈것만 같아서...
맘에 덜드는 나무로 채웠다.
눈에 덜 띄는 나무로...
이번에는 그 옆에 나무를 퍼 갔다.
옮겨 심느라 잎사귀를 다 잘라내 눈에 띄지 않던 나무였는데 그래도 오래 된 나무라서 모양이 제법 그럴 듯 했었다.
봄이 되니 여기저기서 뾰족뾰족 움이 돋아 머지 않아 이쁘게 모양이 잡힐 것 같은 모습에 날마다 바라보며 가슴 설레곤 했었는데...
내려서 둘러보니 장미 세 그루도 퍼 갔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주저 앉고 싶었다.
차에 가득 싣고간 꽃도 나무도 더 이상 심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울고 싶었다.
그 날 아들의 전화에 일을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창 밖만 바라보는 내게 남편이 말했다.
"자꾸 자꾸 사다 심자고... 그 놈이 자기 집 마당을 다 채우면 더 이상 안 퍼 가겠지 뭐..."
남편의 말에 하하 웃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꽃과 나무를 가꾸다 보면 나중엔 아이를 키우는 심정이 된다.
없어진 나무들이 잃어버린 자식들 같아 자꾸 마음이 아려왔다.

 

어제는 그래도 기운을 내서 꽃도 심고 나무도 심었다.
억지로 기운을 내서 일을 하기는 했지만 신이 나지 않았다.
꽃을 살 때도, 나무를 살 때도 이쁜 것을 고르지 않고, 눈에 덜 띄는 훔쳐가지 않을 만한 것을 고르는 마음에 즐거움이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이쁜 꽃도 몇가지 골랐다.
혹시 또 훔쳐가면 어쩌나 염려가 마음을 덮었다.
꽃이 핀 것을 꽃을 다 따버리고 심었다.
당분간이라도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싸구려 꽃들만 꽃이 달린 채로 두었다.
마지막으로 알뿌리를 심고 나니 허리도 아프고 쪼그리고 일하느라 다리도 아팠다.
신나서 할 때보다 더 힘들었다.
물을 주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냥 집으로 왔다.
이번 주는 비가 올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일기예보가 마음에 걸렸지만 귀찮은 생각이 들어 그냥 왔다.

 

새벽에 일어나 그래도 어제 심은 나무랑 꽃들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
물을 주어야 할텐데... 오늘은 바빠서 갈 수가 없는데...
그런데 주룩주룩 빗소리가 들린다.
일기예보엔 비가 올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했다는데...
하늘이 내게 주는 위로라 생각하기로 한다.
하늘이 내 맘을 알고 위로해 주는데 그까짓 일에 더 이상 맘 상하지 않기로 한다.
다시 너그러워지기로 한다.
'그래, 가져 가고 싶으면 가져 가라지... 오죽하면 거기서 퍼 가려고... 열심히 돈 벌어서 또 사다 심으면 되지 뭐... 남편 말대로 실컷 퍼가면 그만 두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