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오늘 아침에 형아한테 꾸중 들었다!!"
배 고프다며 밥을 재촉하는 둘째녀석 성화에 피곤한 몸 간신히 일으켜 주방으로 가는데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녀석은 뒤를 따라 나왔다.
"왜?? 뭐 때문에??"
좀처럼 낯 붉히는 일을 해 본 적이 없는 큰아들녀석이 화를 내다니
믿기지가 않아서 눈이 휘둥그래져 물었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만화책을 보고 있었거든.
형아가 갑자기 소릴 버럭 지르는 거야.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듣는 시늉이라도 해라.
오늘 같은 날은 네가 정말 공부를 해야 하는 거 아냐?
오후에 반편성고사 시험이 있다면서 만화책을 보고 싶니?
내가 일 년에 한 번이나 잔소리 할까 말까 하는 거 잘 알면 빨리 공부해!!'
이러는거야."
"만약에 아빠가 그러셨다면 내가 무지 짜증이 났을텐데
형아가 생전 처음 그렇게 화 내는 걸 보니까 와~정말 무섭대~"
"그래서 공부했니?"
"응, 정말 형아 표정이 무서웠다니까~"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제가 둘째녀석 중학교 졸업이었다.
기대치만큼 따라와 주지 않은 녀석에게 화가 나서
졸업식장에도 안 가겠다고 내대신 아빠와 장남이 가라고 큰소리 치고 출근해버렸다.
동료가 꽃다발과 선물을 들고 사무실에 기다리고 있다가
내 의중을 듣고는 그러는 법이 어딨느냐고 참석하시라고 성화다.
결국 마지못해 식이 끝나갈 무렵에야 식장으로 향했다.
모처럼 우리 네식구 함께 모여 점심을 먹는 옆자리에
같은 학교 졸업생 가족들이 먼저 와 식사를 하고 있다.
아빠인 듯한 이가 장모님이신 듯한 분께 아이 엄마 흉을 본다.
'아니, 기왕 같은 말이면 좀 이쁘게 하면 얼마나 좋아요.
'넌 어떻게 된 녀석이길래 맨날 텔레비젼만 보니?
공부 좀 해라 공부 좀...'이러거든요.
나 같아도 공부할 맘이 싹 달아나게 퉁명스럽게 말을 한다니깐요.
텔레비젼 많이 봤으니까 이젠 공부 좀 하면 좋겠다~
이럼 훨씬 더 낫잖아요."
속으론 마치 내 얘길 듣는 듯 뜨끔하여 내 언행을 한 번 되돌아 보며
아이의 심리 파악을 여유롭게 잘 하고 있는 아빠인 것 같아 한 번 더 바라다 본다.
그러다 날 보며 무어라곤가 웅얼거리는 둘째놈과 딱 눈이 마주쳤다.
뭐라고???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 들어 내가 눈짓으로 물었다.
입모양새를 보아하니, '엄마하고 똑 같네 '하는 거 같다.
여우같은 녀석!
네가 오죽하면 엄마가 그럴까...
마음에 좀 걸려 옆에 앉은 큰아들에게 목소리를 낯춰 물었다.
"얘, 네 엄마도 그렇게 교양없이 말하니?
내가 잔소리하는 타입의 엄마야??"
잠시 미소를 짓던 녀석이 입을 연다.
"요즈음엔 엄마가 좀 심하신 거 같아.
오늘 같은 날은 그냥 편하게 놔 두셔도 되잖아요."
"아니~내일 그렇게 중요한 시험이 있다는데
놀 궁리만 하는 네 아우 좀 봐라.
내가 속 터지지 않겠니?"
"그건 인혁이가 좀 심했네~"
그런 일이 있었는데 둘째녀석이 배짱 좋게 아침부터 만화를 봤던 모양이다.
엄마가 좀 심하셨다고 말은 했지만
내심 내 마음을 읽고 있던 생각 깊은 아들녀석이 호되게 한마디 한 게 먹혀 들어 간 모양이다.
어찌나 속이 후련하던지 피곤하단 좀전의 생각이 말끔히 달아나 버렸다.
이젠 아들녀석들이 내 키보다 훨씬 더 커버려
올려다 봐야할 정도가 되고보니 녀석들에게 함부로 말 하기가 주춤거려진다.
특히 말수가 적고 사려 깊은 큰 녀석에겐 더더욱.
'엄마가 요즈음 이상하게 좀 심하셨다'는 큰녀석의 말이 마음에 걸려
출근길 기사 노릇해 주는 녀석에게 재차 물었다.
'얘, 엄마가 정말 잔소리가 심한 타입이니? 그래?'
"아니에요~전혀!!
엄마! 다녀오시우~"
"그래~사랑하는 내 아들~ 운전 조심해~"
밝고 경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멀어져 가는 녀석의 뒤통수를 바라 보며 중얼거린다.
그래.
나 ... 너희들 때문에 이렇게 버티고 사는거야.
아무리 힘들어도 소중한 너희들이 든든히 내 곁에 버텨 주고 있기 때문에...
연일 봄비가 내리더니 아침엔 쌀쌀한 바람이 살갗을 스친다.
이 비 개고 나면 화사한 봄햇살이 난무하겠지??
밝고 화사한 햇살처럼 마음까지 환하게 해 주는 나의 희망 두 녀석들을 떠올리며
가슴을 쫙 펴고 하늘을 본다.
'엄마!
오래오래 살아~
나랑 같이 죽어~
내가 한의대 가서 엄마 늙지 않고 안 아프고 오래 살게 해 줄께~'
밤마다 몇 번씩 날 껴안고 속삭여 대는
둘째녀석의 말이 허공에 붕붕 떠 다니는 거 같다.
오늘 하루도 무척 행복한 시간들로 엮어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