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아! 하늘만 보면 가을인 듯 착각하리 만큼 맑은 오늘 우리가 열여덟살 때로 돌아가 본다.
젖살 덜 빠진 아이처럼 오동통한 얼굴과 말똥 구르는 것만 봐도 하하호호 웃어대던 한 무리의 여학생. 그 속에 너와 나 그리고 부산과 원주 서울로 각자 신랑따라 헤어진 친구들.
밤 늦은 하교시간에도 공장 굴뚝엔 연기가 나고, 우리가 이름 붙인 하천 세네르강에 달빛 불빛 유유히 흐르고, 강변에 주황색 불빛 포장마차에 오골오골 모여 도너츠 한개로 허기를 채우면서도 무엇이 그리도 즐거웠을까
니가 있어 우리는 배고픔도 힘듬도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지 싶다.
보는이로 하여금 저절로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너의 재주를 두고 쌍둥이 니동생이 연구대상이라고 국립과학연구소에 보내야 된다 했지.
그때는 이 말도 우리들 사이에 선세이션을 일으켰다. 연구대상이란 말이 유행어가 되기 전이였잖니. 너 정말 연구대상이었어!
운동장에 책상과 의자로 계단을 만들어 졸업사진 찍기위해 애들이 그 자리를 메웠을때 느닷없는 너의 지휘로 우린 애국가 1절을 멋지게 불렀지.
웃기는 니 행동과 엄숙한 애국가의 불협화음에 키작은 교감선생님 왈 “이것들이 미쳤나 느그가 인가이 될라카나 말라카나 니가 그라이 니동생이 연구대상이라제 퍼뜩 치아라 추버서 얼어 죽겠구마는”
우리반 실장님 그때도 체면 개죽되고 말았지만 나는 그 일이 생생히 기억된다.
삼년을 너와 단짝으로 보낼 수 있어 행복했는데 그 후로도 줄곧 너와 함께일 수 있는 나는 행운아였다.
나를 행복하게 하던 너의 그 베시시한 웃음이 나를 화나게 한건 언제였냐면 나이트 가서 남자들이 부킹제의 했을때 싫다고 정색하는 내 옆에서 베시시 웃으며 싫어요 하면 그 남자들이 내 말을 믿냐고? 너는 웃고 있는데. 그기다 술이 한잔 들어가면 더 환하게 웃으니 나보고 어쩌라고? 그사람들 보기에는 "우리 마 같이 술 한잔 하입시더"로 안보였겠냐고.
나 그때 너 그기 두고 도망오려다 꾹꾹 참은거 지금 말한다.
생각나니? J
J 만나러 가면서 친구 다섯을 달고가 바가지 옴팍 뒤집어 씌우고, 뒤에 줄줄이 보이콧 시켜 놓은 친구들 돌아보며 둘이서 걸어가던 너.
그 넓은 어린이 대공원을 몇 바퀴를 돌아도 끝까지 따라다니던 속없는 우리를 잘도 데리고 다녔던 너.
그 J집이 서면에서 빵집했었지?
미팅에서 만나 줄창 만나다 헤어지고 울며불며 편지 날리고 돌아서서 웃던 너. 한달 월급을 서면 지하상가에서 옷, 신발, 양말, 가방과 우리 먹을거 사주며 홀라당 날리던 너. 나도 한번 멋있게 살아봐야 한댔던가? 하긴 그때 우리 월급이래야 일십만원 안짝이었지? 그래도 우리한테는 큰돈이었는데.
니가 화나면 하는말 “가시나야 이기 뭐꼬” 그것도 나중에는 웃고 말면서. 그런 니가 결혼해서 아들이 둘이다는 것도 믿기지 않고, 그렇게 사는 니 삶의 밑그림이 안 그려진다.
숙아! 나는 니가 너무 좋았다. 그렇게 좋은 너를 못보고 산 십년을 우린 만나자는 말만하며 살고 있다.
세네르강과 대공원, 해운대 우리가 줄곧 놀았던 서면일대.
아픔과 상처가 많은 그 곳에 이제는 한번 가보고 싶다.
다시는 생각 않으리 치떨리게 싫던 그 곳이 이제 생각나는 까닭은 나이가 먹어서인지 우리 추억이 고스란히 묻혀 있는 곳이라서인지 모르겠다.
잃은 것도 많고 얻은 것 또한 많은 그 도시에서 다시는 상처 안받을 자신 있을때 가마고 몇 번이고 다짐을 한다.
숙아. 구절초베개랑, 구절초차 만들어서 많이 팔고 돈 벌면 너 데리고 가께.
배고픔을 도너츠 한개로 달래던 가난한 학생이 아닌 멋진 중년이 되어 걷는 세네르강변은 어떨지 벌써부터 막 설렌다.
나는 지금도 살면서 니 생각하며 혼자 웃을때가 많다. 그래서 보고 싶은데 니는 내가 안보고 접나?
나는 니가 억수로 보고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