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붙이지 못한 지난 봄에 쓴 편지 한 통.
어머님에 대한 나의 감정이 뭔지 복잡하다.
어머님 하얀 벚꽃이 봄 하늘을 나풀거리는 화창한 날에 우리 어머님 마음도 저꽃처럼 화사했으면 바래 봅니다. 어쩌면 타다가 지쳐 배꽃처럼 하얘져버렸을 마음으로 고추모종에 메주콩, 호박을 심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니복 저것도 내복” 이말속에 담긴 무수한 뜻들을 무시하고픈 마음이 간절하지만 어머님 살아오신 날들을 돌이켜보면 단순히 무시해버리지도 못할 듯 합니다.
시어머니한테 맞으면서 반항도 못하고 다시 큰집일을 도우러 가셔야만 했는지 이해가 안되는 상황들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할 것 같은 어머님 인생. 장남과, 장남며느리, 장남손자만 귀히 여기신 청상과부 시할머님.
제가 도시생활 접고 섬으로 내려와 살때는 이세상 사람이었고, 힘없고 늙은 보통의 할머니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님을 두고 어머님께서 풀어 놓으신 넋두리들 저는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합니다.
햇빛좋은 겨울날 한낮이면 어김없이 찾아오시던 시할머님.
저와 아이들 셋이 할머니! 라고 맞으면 좋아라만 하시던 노할머님이 내 아이의 아버지와 내 아이 아버지를 낳아주신 어머님을 그렇게도 힘들게 하신 분이었으리라는건 상상이 안되게 노약하신 할머님의 구부정한 허리가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하얀 고무신에 온기라고는 없어보이는 벙벙한 치마속에 동동 걷어올린 속곳, 겨울 나목색 스웨타 단추를 어긋지게 채우고 애기손으로 한줌도 안되는 쪽진머리에 꽂힌 짧은 비녀까지, 그 어디에서도 요강단지 집어 던지며 어머님께 패악을 떨었다던 모습은 찾아볼수 없는 초췌함으로 반만 열린 대문을 밀고 들어서던 모습의 할머님 돌아가신지 몇해가 지나도 어머님 가슴에 맺힌 한은 좀체 풀어질줄을 모르십니다.
내 아들이 찐고구마 한개 집어 들려고 할때 장남 손자 줄거라며 고구마 소쿠리를 뒤로 감추더라는 말을 들었을때 친할머니 손에 의해 삶은 고구마 한개 얻어 먹을수 있는 기회마져 박탈당했다 생각하면 아무리 부모자리라 해도 가슴에 맺힌 한이 쉬이 풀어질 일만은 아니지 싶어 딴은 그럴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하루종일 농사일 하고 소주한잔 하시면 구구절절 풀어 놓으시는 말씀들 들을때마다 우리 어머님 또 시작이다 하면서도 짠한 마음일때가 많았답니다. 이미 고인이 되신 시어머니인데도 저렇게 절실하게 원망스러울수도 있구나 싶어 마음이 무겁기도 했습니다. 할머님 살아 계신 마지막 겨울이었습니다.
아침상 설거지를 끝내고 차분하게 차한잔 하고 있을쯤 손바닥으로 돌담을 몇 번을 짚어가며 오셔서 햇볕 따뜻한 토방에 앉아 가쁜 숨 몰아쉬는 할머님께 소주 한컵과 구운김 통째로 드리면 목마른 사람 찬물 마시듯 단숨에 드시고 “할머니 한잔 더 드릴까요?”하면 으레 손사레를 치시지만 정작은 두 번째 잔까지 시원하게 비우기 일쑤였습니다.
“어마이 내 며느리가 주는 술이 목으로 넘어가요? 나 같으면 그 며느리 손에 물한잔도 못 얻어 마시겄소.” 그러면 할머님은 한결같이 “그랑께” 하셨습니다.
그랑께란 한마디의 함축어에서 당신께서도 옛날일들을 후회하는거라 느꼈습니다.
저도 할머님이 항상 반갑지만은 않았습니다. 날마다 궁금하신건 또 왜 그리 많으신지 이것저것 물어 오실때면 대답하기 귀찮기도 했고, 이불 뒤집어 쓰고 누워 편하고 싶을땐 속으로 얼른 가셨으면 싶기도 했고, 이제 그만 오셨으면 싶기도 했지만 할아버지 제사때 할머님이 주전자에 끓인 물을 병에 담고 계셨는데 큰어머님이 섬덩이 만한 몸둥어리로 복잡한데서 성가시다며 발로 툭툭 차는걸 보고난뒤부터, 집이 추워서 우리집에 오신다는, 혼자계시면 점심을 안드신다는 말씀을 들은 후부터는 저까지 덩달아서 할머니를 싫어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님 돌아가시기전 병원에서 아버님께 그러셨다면서요 “언제가서 먹으까! 작은집 며느리 나 가면 술도 한대접 국도 한대접 밥도 한대접인데 나 언제가서 먹으까!” 항상 좋아서 한게 아니라 부끄러움은 있지만 할머님 마지막까지 그걸 마음에 두고 가셨다는 사실에 제가 참 기특했습니다. 할머님 돌아가시고 소리내어 우는 큰집 식구들한테서 본. 말로는 표현할수 없는 그 어떤것과 아무소리도 내지 않는 우리집 식구들의 회한을 보면서 저는 왜 이쁜자식 매한대 더 때리며 키우란 말이 퍼뜩 생각 났을까요. 어머님 아들셋과 두딸이 하나같이 중학교에 가서야 할머니가 사촌들의 할머니뿐만 아니라 우리한테도 똑 같은 할머니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할머님이 어머님과 어머님의 자식들한테 준 상처가 얼마나 큰지 짐작하고도 남을 만한 말이었습니다.
아버님 군대가시고 새색시로 심청많은 홀시어머니 시집살이 하고 아버님 제대하여 사촌 큰집 사랑방에 살림 났다가 한집에서 짐승하고 사람이 같이 새끼 낳으면 안된다고 산기있는 어머님 내쳐져서 배움켜 쥐고 고모님댁까지 와서 큰아들을 낳으셨다며 돼지새끼보다 못한 자식 낳았다고 목메시던 어머님이 안타까워 할머님보다 어머님의 사촌동서인 큰어머님이 저는 더 싫은데 어머님은 그분을 잘도 챙기십디다.
당신손으로 그렇게 귀히 키운 장남 손주들, 큰집손자 몫이라고 찐고구마 소쿠리 뒤로 감추면서 귀히 키운 그 손자 같은 섬에서 결혼식해도 참석 못하셨지만 어머님 큰아들 광주에서하는 결혼식에 할머님 한복 해입히시어 참석케 하시고, 칠순잔치 앞장서 차리셨습니다. 말로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생겨 먹었으까 하시면서 몸으로는 할머님 입성 챙기시고 큰어머님 노환에 치매끼까지 있어 목포 아들네서 가끔씩 내려오시면 새로 담은 김치며 반찬 챙겨서 갖다드리는 어머님이 마땅찮아 “돼지새끼 낳는다고 산기 있는 사람 내친 양반 뭣이 좋다고 그라고 챙겨싸요?” 라고 싫은 내색을 하는 제게 “시어머니 난 주왕에 며느리 난단다” 마음을 넓게 써라시는 어머님을 저는 언제쯤 완전하게 이해할수 있을까요.
저는 항상 시간이 지나고서야 어머님을 조금씩 이해하는 못난 며리리입니다.
저도 압니다. 제가 결코 괜찮은 며느리가 아니라는걸. 어머님 생각에 반기를 들고, 아닌것에는 아니라고 말해버리고, 아침상 한번 차려본 기억이 없는 되먹지 못한 며느리임에 틀림 없는데 어머님 속은 어떨지언정 우리 며느리가 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뭐든지 못하는 것이 없는 최고의 며느리라고 추켜세우십니다.
안해서 그렇다는 부제는 붙었어도 최고 며느리라 추켜세우면 지가 최고가 되려는 최소한의 노력은 하겠지라는 어머님 페이스에 말려 제나름으로는 잘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답니다. “시어머니 난 주왕에 며느리 난다”는 거에 한가지는 제가 확실히 본을 받은 듯 합니다. 어머님 목소리 만큼 제 목소리가 커잖아요.
살아오시면서 억울함과 가슴아픔을 너무 많이 겪으신 아버님의 소심함이 약주한잔 하시면 억눌림이 풀어지심으로 인해 더러는 어머님과 언성을 높여가며 언쟁을 하고 더 큰 싸움이 있는날이면 이런 저런 말들 풀어놓으시다가 눈물바람 하는 어머님께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았냐고 물어보면 어머님의 큰목소리는 어느새 웃고 계십니다.
우리 어머님은 남자들 보다 힘도 세고 억척스럽다고만 생각했었습니다.
섬에 사는 여자들이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다에서 파도소리와 함께 일을 하기 때문이더라는걸 살아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어머님의 큰 목소리가 억척스러움으로 보이게 하지만 정작은 마음이 아주 여린 여자일 뿐이란걸 알게 된것도 그리 오래 되진 않았습니다.
칠십이 가깝도록 자식 뒷바라지에 일생을 보내신 두분께서 이제는 좀 천천히 사셨으면 싶습니다. 자식들이 얼른 커기만하라고, 그러면 배고픔은 없을거라 믿으며 열심히 사셨지만 지금은 배만 부르면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잖아요.
두분 마음 바쁘게 만든 저희들이지만 조금만 여유를 가져 주십사 감히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느거 엄마 고생 참 많이 하고 살았다. 느거가 잘해라” 라고 하실 때 아버님의 슬픈 눈을 보면서 십년새 참 많이 늙으셨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식들한테 김보해씨란 호를 부여받을 만큼 주당이실 때 오기창창함의 아버님과 술기운이 전혀 없을때 온순하심의 아버님을 이껴가며 살아오신 어머님 인생의 손익계산서가 저희들이 사는 모습인데 아직 손익분기점은 보이지 않네요. 좋은 모습만 보이며 살고 싶은데 욕심대로 살아지지가 않습니다. 어머님! 저희들 형제간에 우애있게, 마음으로는 그 누구도 부럽지 않는 부자로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