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어머니께서 오셨답니다. 락앤락 통에 김치 한통 담가서 가지고 오셨습니다. 가지러 갈 수 있다고 해도 굳이 가지고 오신 어머니. 어머니를 모시고 온 것은 서른을 훌쩍 넘기고도 장가 갈 생각을 않고 있는 노총각 동생입니다.
커피를 한 잔 하면서 문득, 어머니께서 물으셨습니다.
"얘, 이 소파는 왜, 지퍼가 앞으로 나와있노?"
"아, 그거 너무 낡고 찢어진 곳도 많아서 일부러 뒤집어 둔 거에요"
저희 집 소파는 산 것이 아니고, 신랑이 아직도 여전히 친구따라 강남다니면서 뜬 구름 쫓던 때에 철거예정인 아파트에서 주워 온 것입니다. 신랑은 친구와 함께 그 아파트 철거를 했었습니다. 공공사업체의 사택이었던 그 아파트촌이 사라진 자리에 울산에서 비싼 걸로 몇번째에 드는 고급 아파트촌이 들어섰지요.
이사가면서 사람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을 주워왔었는데, 쓸모있는 것들이 꽤 많았고, 그 가운데 지금도 쓰고 있는 것이 방문에 매어달아놓고 타는 어린이그네와, 거실에 있는 소파랍니다. 남이 쓰던 물건인데다가 저희집에 온 지도 오래 되어서 이제 너무 많이 낡은 그 소파를 낡은 커텐천 뜯어서 여기저기 깁고, 어떤 부분은 신랑이 주워 온 가죽 조각으로 떼워서 쓰고 있는데, 앞부분이 너무 많이 낡아서 보기에 불편하니까 차라리 지퍼가 앞으로 나오게 해 놓은 것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이 나온 김에 저는 소파에 얽힌 짧은 사연을 말씀드렸지요. 식탁도 치우고, 교자상으로 바꾸고, 하면서 소파도 버리는 쪽으로 의견을 가지고, 넓게 살자고 의견을 맞추었었지요. 그런데, 소파를 버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이, 읍 사무소에 가서 스티커를 발부받아와야 하는데 비용도 들고, 시간도 들고, 덩치 큰 물건이니 신랑의 협조없이는 아래로 들고 내려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다가 고만 가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얼마전에, 이것 올 가을 넘어가기 전에 꼭 버려야겠다고 했더니 신랑이 자기는 소파 없이 못 사니까 중고라도 하나 사 들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중고지만, 소파인데 아이들 과자값은 아니겠지요. 깜짝 놀란 저는 아니, 취소한다고 당분간 그냥 이것 쓰자고 그렇게 말하고 말았겠지요. 어머니께 생각난 김에 이런 얘기를 해 드리는데, 어머니가 뜻 밖의 말씀을 하셨지요.
"야야, 그래도 밖에서 쓸라카고, 안에서 말기는 쪽이 낫다."
하, 그것은 어머니께서 평생 해 오신 말씀이었습니다. 친정아버지 이야기였지요. 해방 전 일본에서 생활하시면서 고생고생하고, 해방 후 국내로 들어올 때 모아 둔 재산 바다에 다 빠뜨려서 국내에 들어와서도 초등학교만 겨우 마치고, 못 다 이룬 배움의 꿈을 독학으로 이루시느라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고생하신 친정아버지. 아버지는 근검과 절약이 몸에 밴 분이었고 평생을 사시면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못 배워서 남보다 많이 벌지는 못 하지만 부지런하면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할 만큼은 살 수 있다고 신념으로 삼아오신 분입니다.
공부 할때 차비아끼느라고 동래에서 초량까지 걸어다니신 아버지. 차분히 아버지의 삶을 생각해보면 참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셨다는 것, 인정받을 만한데. 문제는 자랄 때 그렇게 찢어지는 고생을 해 보지 않으신 어머니하고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매로 만난 두 분은 농촌 출신인 어머니가 오히려 더 많이 배우고, (어머니는 정규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분이거든요) 자랄 때도 더 풍족하게 자란 사람이어서 아버지의 몸에 밴 근검절약을 이해 못 하셨거든요.
"봐래이. 일 하러 다닐 때 저녁에 빨래 돌리났다가 아침에 널라고 베란다에 불을 캐제. 세탁기에 빨래 넣고 세제 널가카믄 불이 탁 가삐. 와 이래 어둡노? 카고 보믄 니 아버지가 탁 꺼삔기라. 그 뿐이가? 머리 좀 깜을라고 보일라 틀어놓고, 한 5분 있다가 들어가제. 그라믄, 물 틀자고만 찬물이 나와. 뜨신 물 나오겠지, 하다가 고만 찬물에 실컨 씻고 나온다. 알고보믄, 니 아버지가 내 드가자 꺼삔기야. 아무리 절약도 좋지만, 이기 사람이 살겠나? 내가 평생을 그래온다. 심장 상하는거 참 아무도 모른다. 그러이, 내가 맨날 싸워야되고. 전에는 내가 장사를 하니까 그래도 내 손에 돈이 좀 있으이, 살살 돌려썼는데 그래도 못 하이 이제 말도 못 하고..."
하기는 같은 여자의 입장이 되어서 어머니를 보면, 아버지의 근검절약은 지나친 면도 있어보입니다. 절대빈곤의 시대에 큰 아버지는 대처로 나가 집안을 돌보지 않는데, 동생 여섯과 과부 어머니, 과부이모에 사촌들까지 건사하면서 오직 내 한몸 희생으로 사셨던 아버지. 혼자만 희생되고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 때의 습관으로 평생을 일관하신 아버지를 어머니는 지금도 다 이해 못 하신 것 같아보입니다.
이제 저도 결혼을 하고 나이를 먹고 생각해 보면, 두 분은 평생 그 문제로 다투셨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는 농촌이었지만, 공무원이었던 외할아버지밑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육이오직전에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돌아가시고, 겨우 한글은 깨쳤지만 무학이었던 외할머니를 도와 큰 농사를 짓고 집안을 건사하고, 동생들을 돌보고 일꾼들을 거느렸던 것은 어머니였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군무원시험도 치렀는데 외할아버지의 전적이 있어 필기시험에 붙고도 군무원을 할 수가 없었더랍니다. 그래서, 그 당시 유행하던 편물기술을 배워서 기술로도 돈을 좀 벌고, 남을 가르쳐서도 돈을 좀 벌었더래요.
처녀시절, 아직 댕기머리 처녀들이 있던 농촌에서 단발머리에 가발하고 미니스커트입고 하이힐 신고 부산으로 나들이다니던 어머니. 금강원에서 찍은 어머니의 사진을 보면 참 요즈음의 저보다 더 멋쟁이입니다. 그런 어머니와 옷이란 물려입고, 기워입고, 주워입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가 만났습니다. 애 넷 키우던 시절에 아무리 힘들어도 어지간한 거리는 걷고, 많이 멀면 버스타면 되는 아버지를 보면서 어머니는 원망을 가슴에 키웠을 겁니다.
지금도 어머니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냥 막 쓰고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 내가 배울만큼 배우고, 계획도 할 줄 알고, 앞날도 내다볼 줄 알고, 이리저리 재서 생각도 할 줄 아는 사람이야. 못 배아서 생각없이 아무렇게나 하는 사람하고는 다르거든. 그런데, 니 아버지는 평생을 그저 안 쓰는 것, 못 쓰는 것, 그렇게 하면서 나를 들들 볶는다. 야야, 말도 마라. 연탄불 피아가 밥 해 묵던 시절에 음식을 연탄불에 얹어놓고, 끓기 시작하믄 아궁이 구멍을 막아버린다. 일단 끓이야, 끓이놓고 불을 조절해야 되는데, 무조건 막아버리믄 음식이 되나? 제대로 안 익는거야. 그런 사람하고 무슨 말이 통하겠노?"
덧붙일 말도 없어 그냥 계면쩍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딸들에게 기어이 어머니는 한 마디 덧 붙이십니다.
"그런다고 더 잘 살았나? 아이구, 부지런한 것 빼고 머가 남았노? 사람이 머리를 써서 살아야제. 일로 적게하고 머리를 써서 사는 사람이 약은 사람이제. 너거 아버지는 평생 살아도 늘 푼수는 없는사람이라"
어려서부터 늘 들어 온 얘기들. 나이가 먹으면서 때로는 엄마편에서 아버지를 폄하했다가, 때로는 아버지편에서 어머니를 낭비하는 여편네로 만들다가. 그런데 이제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저도 한 남자와 찌그덕 삐그덕 끼워 맞추면서 살다보니까, 두 분 누구를 탓 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경제문제는 단순히 경제 문제가 아니고, 세상을 바라보고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여서 그렇게 무 베듯 단순하지가 않다는 것을 살면서 깨우치고 있기 때문이지요.
부부가 같은 창을 통해 세상을 본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만, 정말로 그런 부부는 100쌍의 부부가운데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도 안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상대가 바라보는 창에 눈을 대보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내가 바라보는 창이 옳다고 한번 결론을 내린 순간, 상대방을 끌고오려고만 안간힘을 씁니다. 이 창이 옳아, 여기 와서 세상을 한번 바라 봐. 당신은 잘 못 된 창을 바라보고 있어.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상대방을 끌고오는 노력보다 나를 한번 움직이는 것이 더 쉬운 것이 아닐까요? 관대하게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 그런 것 말고. 아예 나의 생각으 잠시 놔 버리는 것입니다. 편안하게, 내 생각 내 관점은 놔 버리고. 그냥 그 사람의 관점이 되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대방의 관점이 되다보면 상대방에게서 내 모습을 보는 날도 있겠지요. 그렇게 조금씩 닮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머니는 저녁 드시고 가란 말에 아버지는 저녁밥 늦는 것 절대로 못 견디는 분이니, 얼른 가서 저녁 차려 드려야 한다고 하시면서, 아버지 들어오실 시간 되었다고 부랴부랴 그렇게 가셨습니다. 어머니를 보내면서, 저렇게 맞추어가는 것이라고 혼자 웃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