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파시가 통했음일까 방청소를 하다가 아들아이 어린시절부터 고3때까지의 모습이 담긴 앨범을 펼쳐보았다. 태어나 처음 세상에 인사하던 날 찍은 보라색 발도장과 엄마 이름표를 발목에 동여메고 '으앙' 울어대던 모습박힌 출생증명서 늦게 장가간 아들이 아들봤다고 작명원에 가 얼른 이름지어 보낸 할아버지의 사랑... 생후 20일부터 자라온 모습들을 열심히 찍어 정리해 놓은 사진첩을 보고 있으니 그래도 이때가 좋았는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과 나의 나이가 더해갈수록 사진찍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어 가고 있었다. 배시시 웃으며 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 여기가 어딘줄 알아?" "어딘데?" "여기 수원이야" "어머 그러니 그렇지 않아도 네 어린시절 앨범 보고 있었는데..." 언젠가 아들은 공부에 지쳐있을때 소리를 지르며 떠나고 싶다고 하였다. 농으로 웃으면서 한 말이였지만 진심이었으리라.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으면 학교를 마의 소굴이라고 농반 진반 그리 말했을까. 추억이 어리고 우정과 사랑을 만들며 배움의 터전으로 만들어 갔던 우리네 학교가 세월흘러 이렇게 변할 줄 누가 알았을까. 0시 수업부터 시작하여 새벽 한시까지 보충과 자율학습을 시키니 그런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싶었다. 안스럽긴 했지만 에미로서 해 줄수 있는 것은 따뜻한 말 한마디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아들은 수능이 끝나면 어린시절 살던 곳에 가 보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서울에서 논술준비하던 아들이 대학 합격발표후 곧바로 집으로 내려오리라 생각했었는데 친정언니 집에 빌붙어 도데체 내려올 생각을 않는다. 다닥다닥 돋아난 여드름을 치료하기 위해 피부과도 가야할것 같구... 여유있을때 운전면허도 따 놓아야 할 것 같구... 부실한 몸 집에서 열심히 먹거리 만들어 살도 좀 찌우고도 싶고... 나는 해주고, 하고 싶은게 많은데 아들은 그곳이 편하다며 내려오질 않는다. 내심 섭섭하기도 하고 어차피 떨어져 지낼 몸 두어달만이라도 같이 있지 하는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 하고픈 대로 하고 지내니 이젠 손안에 자식은 물건너 갔나 하는 의구심마져 들었다. 그런 아들이 제 원대로 어린시절 8년간 살았던 고향 수원을 찾아간 모양이었다. "엄마 그땐 무척 넓다고 생각되었는데 공간이 너무 좁고 유치원도 이름이 바뀌었네..우리가 살던 옆집은 피부미용이란 자그마한 표지판이 문앞에 붙어 있구..." 주절주절 전화선을 타고 들려온다. '그럼 그랬지. 그땐 어린아이였으니까 모든 것이 넓고 커 보였지... 이젠 성인이 되어 과거 속으로 들어가 본 너의 어린시절..15년전으로 흘러 가 보는구나'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수원까지 내려가면서 어떤 생각에 젖었을까. 아직 지인들이 그곳에 살기에 연락해 줄까 했더니 그냥 살던 아파트만 둘러보고 간다며 전화를 끊는다. 벌써 이렇게 아들은 성장해 있었다. 앨범 속 해맑게 웃던 아이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홀로 제 살던 곳을 찾아가 볼 정도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스무살 적 내가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을까.. 어린시절 서울 변두리에 살면서 아이들과 딱지치기 구슬치기하며 남자아이 처럼 지냈는데.. 뚝방이라 불리우는 길따라 학교에 오가면서 길옆 무밭에 들어가 무도 뽑아먹고 자그마한 가게하는 엄마의 금고 안에서 훔쳐 낸 돈으로 하교길 뽑기도 하구 만화방에 들러 시간가는줄 모르고 만화책에 푹 빠져 있었던 내 유년시절.. 그 과거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스무살 적 해 보았을까.. 반생을 살아온 이제서야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칠 정도이다. 살던 동네를 11년만에 찾아와 감개무량했을 아들... 수원에서의 추억을 가슴속에 하나가득 담고 사는 스무살 아들에게 앞으로도 곱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다듬어 나가길 소원해 본다. 아들의 추억여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