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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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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여자


BY 낸시 2005-01-15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에게 여자가 생겼다.

손톱에 빨간 매니큐어를 하고 하이힐도 신고 폭이 넓은 플레어 스커트를 입고 머풀러로 멋을 낼 줄 아는 여자였다.

결혼식 날을 제외하곤 평생 화장이란 것을 모르고, 뙤약볕에서 농사일만 하다 간 우리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여자였다.

아버지는 그 여자에게 금반지도 해 주고 금목걸이도 해 주고 금 팔찌도 해 주었단다.

우리 어머니는 평생 은반지도 못 끼어 보고 살다 죽었는데...

한 바탕 소동이 일었다.

아버지가 우리의 고향집과 텃밭을 그 여자에게 저당설정을 해 준 것이다.

작은 아버지들, 고모들이 모두 모여 그 여자와 아버지 성토대회를 열었다.

고향집이 아버지 혼자만의 집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추억이 깃든 곳인데 어찌 그리 할 수가 있느냐는 비난에 몰려 그 여자는 돈을 받기로 하고 저당설정한 것을 풀어주기로 하였다.

결국 고향집은 동생이 명의 이전을 하기로 하고 아버지는 논을 팔아서 그 여자에게 주고 남은 돈으로는 생활비를 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울아버지에게 돈이 없다고 생각했던지 그 여자는 아버지가 외출하고 없는 사이에 이삿짐을 꾸려 떠났단다.

나이 들어 판단이 흐려진 것인지, 남자는 늙어도 멋쟁이 여자를 보면 속이 없어지는 것인지 아버지는 그 여자를 잊지 못했다.

모두들 그 여자를 사깃꾼이라고 했지만 아버지에게는 잊지 못할,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여자는 이삿짐을 꾸려 떠난 후에도 가끔씩 전화를 해서 아버지의 애를 태웠다.

결혼하고 십년이 넘어서야 간신히 얻은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각별하였건만 그런 자식들을 미워하고 원망했다.

그 여자가 떠난 것은 자식들이 어머니 대접을 하지 않은 탓이라고 아버지는 믿었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남편이 해외근무를 하는동안 있었던 일이다.

올캐는 내게 전화를 해서 말했다.

"형님이 빨리 들어오셔서 아버님 좀 말려 주세요. 아버님이 형님 말은 좀 듣잖아요."

 

우리가 귀국한 후 아버지가 우리집에 오셨다.

아버지는 내가 보는 책에서 연애시를 열심히 베껴 쓰기도 하였다.

정말 사랑에 빠졌나 보다.

딸이 듣거나 말거나 전화로 그 여자와 사랑을 속삭인다.

난 언니들이나 남동생처럼 끝까지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아니다.

필요하다면 예의 같은 것은 언제든지 헌신짝처럼 던져 버리는 사람이다.

나는 무협지를 즐겨보는 사람이다.

악당들이 착한 사람을 우롱하는 것 중의 하나가 아무리 자기들이 잔혹한 짓을 해도 착한 사람들은 같은 방법으로 되갚지 못한다는 것이다.

착하니까...

그래서 무협지를 좋아하는 나는 악한 사람을 대할 때는 더 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찍 터득했다.

이런 내게 일찌기 아버지도 두 손 들었다고 했었다.

아버지가 그 여자하고의 통화를 끝내자 물었다.

"아버지 그 여자에게 금반지, 금목걸이, 금팔찌를 해주었다면서요?"

"해 주었지."

"그 여자에게 옷도 여러 벌 해 주었다면서요?"

"해 주었지. 하지만 그 사람이 내 모시 두루마기도 해 주었으니까 나만 해 준 것은 아니지..."

"아버지가 준 돈으로 그 여자가 한 것이라면서요?"

"......"

"아버지 울엄마에게 그 여자에게 해 준 것 중의 하나라도 해 준 적 있어요?"

"없지..."

"아버지 재산 혼자서 일구었다고 생각해요? 그나마 남은 것 엄마가 열심히 일해서 남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니 엄마가 알뜰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지."

"죽은 엄마가 아버지가 그 돈으로 그 여자에게 해 준 것을 알면 뭐라겠어요?

나 무지무지 기분 나빠요.

울엄마가 안입고 안쓰고 아낀 돈으로 아버지가 그여자에게 해 주었다는 것들 때문에 화가 나요."

"......"

"그 여자 때문에 자식들하고 사이가 갈라진 것을 알면 뭐라겠어요?"

이 말에 아버지는 화를 냈다.

"너희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

"나는 그래도 상관해야겠어요.

앞으로 그 여자하고 전화하지도 말고 만나지도 말아요.

망신 당하기 싫거든 말 듣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 여자랑 앞으로 전화하고 만나면 내가 그 여자 만나겠어요.

만나서 길바닥에서 그 여자랑 머리채 잡고 뒹글거니까 알아서 하세요.

아버지 양반 좋아하지요?

양반 체면이 어찌되나 한번 보고 싶거든 맘대로 하세요."

"나 내려 갈란다."

"맘대로 하세요. 간다면 누가 무서워 할 줄 알고?"

"......"

 

그리고 한참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아버지가 사랑하는 막내딸이 되어 말했다.

"아버지 우리 점심에 라면 먹을까?"

"그러자!"

아버지는 선선히 대답했다.

이것으로 아버지는 그 여자의 남자에서 다시 우리의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는 그 후 전화번호도 바꾸고 그 여자와의 연락을 끊은 것이다.

예의 바른 언니나 남동생 말에는 콧방귀도 안 뀌던 아버지가 예의 염치 모르는 막내딸의 협박에 꼼짝도 못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필요하다면 체면이나 예의니 염치같은 것은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체면이나 예의나 염치는 그것을 아는 사람과 상대할 때 필요한 것이지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과 상대할 때는 백해무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