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담기에 한창인 휴일.
이불 빨래 잔뜩해놓고 햇빛을 기다리고 있는 나는 비가 별로 반갑지 않다.
눅눅한 방에 보일러를 켜고 빨래를 말리면서 사람 마음의 간사함에 빈웃음이 나고 만다.
그때 일을 잊고 있다니...
작년과 올해는 자주 내려준 비 덕분에 물걱정 없이 잘살았다.
3년전 봄
지독한 가뭄으로 보길도 상수도 댐에 물저장량이 부족하여 불가피하게 제한급수를 하게 되었노라는 읍사무소의 통보는 이장을 통해 마을 방송을 타고 주민들에게 왔다.
처음 일일급수가 이일급수, 삼일급수, 날이 갈수록 급수일은 길어지더니 마지막에는 육일급수까지 되었다.
우리집은 동네에서도 제일 높은곳.
말그대로 하늘아래 첫집이라 배가 고플때나 여름엔 집까지 오면 다리가 후덜거리고 녹초가 되고 말지만 창문만 열면 보길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경치좋은 집에 사는 댓가라고 위안삼으며 그럭저럭 살았는데 삼일급수때부터는 경치좋은 집만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낮에는 물을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고, 밤이 되어 수도꼭지를 틀면 픽픽소리를 내며 사람 감질맛나게 하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수도꼭지와 모터를 털다가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잠을 설치더라도 물을 받을 수 있는 날은 그래도 운좋은 날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일급수가 되면서는 상수도 물은 아예 포기해야 되었고 노화읍청년연합회에서 지역민들을 위한 물공급 봉사에 나섰다. 차가 최대한 들어올수 있는 장소에서 소방호스로 앞집에서 뒷집 옥상으로, 담으로 뻗어가며 물통에 물을 채워주는 난공사중에 난공사로부터 물을 공급 받으면서 집에는 다소 소홀한 면이 없지 않은 남편의 청년회 활동을 만류하지 않게 되었다.
청년회원들이 자비를 들이고 시간과 노동을 투자한 댓가는 시원한 물한잔, 음료수 한잔이 고작이었지만 그들 스스로 입에서 순수봉사단체라고 해도 그것은 억지 우김질이 아닌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선행으로 전라남도지사로부터 표창장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봉사는 가뭄만 해소한게 아니었다. 그들의 수고 덕에 얻은 물에 대한 감사함으로 한방울의 물이라도 아끼려는 내 아이들에겐 물사랑의 교훈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경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에 비하면 물천국에 산다고 할수 있는 아랫동네에서는 보길도에서 물이 넘어오기 시작하면 모터를 돌려대며 제집 물통 채우기에 바빠 다음 사람들을 생각해줄 여유는 십원어치도 없어 보였다.
물통이 차고나면 집앞 물청소에 세차까지, 그러고도 부족해 가뭄과 햇빛에 목말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자기 집앞 아스팔트에게까지 물을 듬뿍 먹여주는 후한 인정을 베푸는 것이다.
논바닥처럼 쩍쩍갈라진 그들의 양심이란... 지금도 그런 집앞을 지나면 쥔장얼굴을 한번 더 쳐다보게 된다. 저사람이 그랬었지. 그러면서 나는 다짐했다.
그래 나는 적어도 모터를 틀어대면서까지 내 물통에 물을 채우지는 않겠다.
모터를 돌리지 않으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물통은 찰 수 있고, 나보다 열악한 환경의 사람에겐 한방울이라도 더 갈테니까. 먹고 마실물이 절실할때는 내집앞 물청소와 세차따위는 다음으로 미루며 살겠다고 말이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넉넉한 물앞에 나는 어느새 게으름이 생겼다.
쌀씻은 물을 받아 설거지를 하고, 세수하고 머리감은 물에 걸레와 양말을 빨고, 그물은 다시 화장실에 재활용하던, 세수할 양의 물로 머리까지 감고, 머리감을 양으로 샤워까지 거뜬히 해내던 나는 어느새 수도꼭지를 열어 둔채 설거지를 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배에서 내리면 집집마다 파랗고 노란색의 커다란 물통이 섬동네의 대명사가 된 이유는 언제고 물난리가 날수 있는 환경 때문이다.
지난해 보길과 노화 전주민에게 상수도를 보급하고 가뭄대비를 위한 보길도 상수도 댐 증축공사가 시작되면서 노화 보길간의 감정싸움도 같이 시작되었다. 풀뿌리 신문이라 명명한 지방지에 보길이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여 윤선도 유적지를 복원하는 마당에 또다른 유적지를 매몰 시킬수 없으니 해수 담수화로 식수를 해결하라고 공격하면 노화는 해수 담수화의 비효율성과 식수를 주는 조건부 타협은 부당하다 반격하고, 노화가 공격하면 보길이 또 반격하는 과정에서 환경과 문화재를 지독히 사랑한다는 보길도 시인양반의 단식투쟁은 청와대 민정수석까지 보길도로 불러 들였고 지방자치단체장과 해당 공무원, 시공사대표, 주민대표의 간담회 결과 공사는 끝내 중단되고 말았다.
수질검사도 제대로 받지 않은 지하수에 의존하는 노화도 10여개의 마을에 상수도 공사는 끝났는데 그 배관에서는 언제 물이 흐르게 될지 기약도 없다.
환경도 좋고, 문화재도 보존해야 된다. 그러나 물은 먹어야 된다.
요즘 지방 신문에 고정칼럼처럼 실리는 단식투쟁가 시인의 글을 나는 의식적으로 피하게 된다. 사람보다 자연과 문화재를 사랑하니 글은 오죽 아름답고 서정적일까만은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더 좋다.
사슴모가지로 보길을 향해 기웃거리며 보길도의 처분만 바라는 꼴이 된 우리 노화 주민들도 물 난리가 났을때를 생각하여 물을 정말로 아끼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