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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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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데이트 하던 날.


BY 낸시 2004-12-02

통학 버스 안에서 만난 소년이 소녀에게 무슨 말인가를 했다.

소녀는 가슴이 두근거려 소년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부끄러운 소녀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소년도 부끄러웠다.

더 이상 말을 붙여보지 못하고 멋적은 표정으로 버스에서 내리고 말았다.

버스에서 내리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고 소녀는 후회하였다.

말대꾸도 하고, 웃어도 줄 걸...

웃는 모습이 예쁘다고 모두들 그랬는데...,

그 예쁜 웃는 모습도 소녀는 부끄러워 소년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소녀는 차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입학하여 기숙사로 떠나면서 작은언니가 소녀를 대문 밖으로 불러내 은밀히 말해주었다.

소년이 언니에게 부탁하였단다.

소녀를 만나고 싶으니 말을 전해 달라고...

날자와 시간을 전해 받은 소녀는 좋아서 가슴이 콩콩 뛰었다.

하지만 부끄러운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그래서 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싫어, 언니, 창피해..."

아직 데이트 한번 못해 본 언니는 그래도 언니답게 의젓하게 말했다.

"괜찮아, 한번 가 봐라. 괜찮은 아이 같은데..."

 

작은 언니는 그렇게 말하고 기숙사로 떠났다.

소녀는 그래도 망설여졌다.

큰언니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소녀는 큰언니의 의견을 묻기로 했다.

지난 크리스머스 때 소년은 소녀에게 카드를 보냈었다.

소녀가 보여 준 카드를 보고 큰언니는 소녀에게 축하한다고 말해주었었다.

이번 일도 큰언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소년이 큰언니랑 작은언니랑 같이 있을 때 말했기 때문이란다.

큰언니도 소녀의 데이트를 적극 지원해 주었다.

한번도 제과점이란 곳을 가보지 못한 소녀를 위해 조언도 하였다.

소년이 무엇을 먹겠느냐고 물으면 고로게 빵을 먹겠다고 하라고 일러주었다.

혹시 소년이 돈이 부족할지도 모른다고 용돈도 주었다.

 

1971년 1월 18일, 오후 1시. 소녀는 그 날 그 시간에 수업이 있었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소녀가 다니던 학교는 정규 중학교가 아니었기에 겨울 방학도 없이 수업을 하였던 것이다.

일류 고등학교에 무시험 진학을 한 소년은 소녀의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전화가 흔치 않았던 때다.

소년도 소녀도 전화가 없는 집에 살았다.

소녀는 그 날 조퇴를 하고 소년이 정한 장소로 가든지, 소년을 혼자 기다리게 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였다.

소녀는 이번에도 바보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큰언니가 말해 준 고로게 빵도 먹어보고 싶었다.

 

담임선생님에게 무어라 거짓말을 하고 조퇴를 해야 하나, 소녀는 하루 종일 고민을 하였다.

아프다고 해야 하나, 집에 일이 있다고 해야 하나,...

이리 저리 궁리를 했지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거짓말은 소녀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간은 자꾸 다가오고 있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로 소녀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저 조퇴를 해야 되는데요..."

"왜?"

잠시 망설이다 소녀는 말했다.

"저~... 누가 만나재요."

소녀의 입에서 흘러 나간 것은 소녀가 준비했던 거짓말이 아니었다.

잠시 멍한 표정이 된 선생님의 얼굴에  차츰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몇 시에 만나자고 했는데?"

"1시에 만나재요."

잠시 생각한 후 담임선생님은 말했다.

"그래? 그럼 수업 한 시간 더 하고 가도 되겠다. 한 시간만 더 하고 가 봐라."

 

소년이 정한 제과점을 향해 걷는 소녀의 가슴은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했다.

제과점이 가까워질수록 소녀의 발걸음은 느려졌다.

소년이 정한 시간 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다.

먼저 가서 기다릴까, 아니면 살펴보기만 하고 없으면 돌아 나올까, 소녀는 망설였다.

하지만 소녀는 그 제과점 문을 밀고 들어 갈 용기가 없다.

이런저런 생각에 자꾸 느려지는 발걸음으로 그냥 그 앞을 지나쳤다.

소녀는 다시 한번 자신의 바보스러움이 싫었다.

제과점이 멀어지자 소년의 잘 생긴 얼굴이 떠올랐다.

큰언니가 일러 준 빵 이름, 고로게도 떠올랐다.

소년의 잘 생긴 얼굴과 웬지 맛있을 것만 같은 빵 고로게의 유혹에 소녀는 발길을 돌렸다.

다시 그 제과점을 향해 걸었다.

그 제과점 앞에 섰다.

역시 문을 밀치고 들어 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제과점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소녀는 시내 버스 배차장을 향해 걸었다.

소녀는 버스가 오면 타고 집으로 갈 심산이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배차장에 서서 소녀는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버스가 왔다.

그러나 소녀는 타지 않았다.

그 버스를 놓치면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줄 알고 있었지만 소녀는 그 버스를 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집으로 가면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씁쓸한 맘으로 자신의 바보스러움을 곱씹으며 소녀는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나타나지 않는 소녀를 기다리다 그만 포기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 배차장으로 간 소년은 거기서 소녀를 보았다.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책가방 손잡이를 잡고 서있는 소녀의 자세는 꼿꼿하다.

여느 때 처럼 옆도 돌아보지 않는 새침한 태도다.

"어..., 여기 있었네...  잠깐 이야기 좀 했으면 하는데..."

소년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길이 아래로 깔린다.

거부하는 눈빛은 아니다.

소년은 앞장서서 제과점으로 향했다.

소녀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소년의 뒤를 따르면서 소녀는  큰언니가 일러준 빵 이름 고로게를 잊지 않기 위해 한번 더 떠올렸다.

 

"아줌마, 여기 빵하고 마실 것 좀 주세요."

제과점에 간 소년은 이렇게 주문을 하였다.

"학생, 뭘로 줄까?"

소년은 소녀에게 무엇을 먹을 것인지 묻지 않았다.

"그냥, 이것 저것 알아서 적당히 주세요."

머릿 속에 다시 한번 큰언니가 일러 준 빵 이름 고로게가 떠올랐지만 수줍은 소녀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소년은 소녀가 고로게를 먹고 싶어 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제과점은  소년에게도 익숙한 곳이 아니어서 소년은 고로게라는 빵이 있는 줄도 몰랐다.

 

"아줌마가 된 소녀는 아저씨가 된 소년에게 투덜거린다.

"그 날 고로게를 사주지 않았을 때, 내가 짐작했어야 되는데... 제 멋대로 하는 사람인 줄..."

아줌마가 된 소녀는 언니들에게도 투덜거린다.

"그 때 내가 데이트하기 싫다고 했을 때, 언니들이 자꾸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저씨가 된 소년도 처형이 된 큰언니에게 투덜거린다.

"괜히 고로게는 가르켜 주어 나를 평생 죄인이 되어 살게 하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