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옷비료포대로 지어 준 비옷이었다. 어머니는 때때옷을 입혀 주듯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비옷을 입혀 주셨다. "잘 맞는구나. 태풍이 불어도 끄떡없겠다. 학교 도착할 때까지 절대 벗지 말아라." 골목길을 나서니, 우산을 쓰고 가던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복합비료가 걸어 다닌다" "죽을래! 내가 무슨 복합비료야." 생각지도 못했던 놀림을 받고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이들은 걸어 다니는 복합비료가 나타났다며 내 뒤를 밟으며 소곤거렸다. "얘! 나도 한 번 입어 보자." "나도, 나도..." 형이 대문밖을 나서자마자 비옷을 벗어 버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이들의 입술 위에는 장난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야, 비옷 벗어." "비 맞기 싫은데." "이 자식이 죽을 라고, 안 벗어!" 도끼눈을 한 형이 나를 노려 보았다. 아마도 형은 동생인 내가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는 것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것보다 창피한 것 같았다. 하는 수없이 나는 비옷을 벗어 책이 젖지 않도록 책보자기를 감쌌다. 바람을 동반한 빗줄기가 옷깃을 파고 들었고 물에 젖은 까만 고무신은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끈적거리고 미끄러졌다. 나는 그제 서야 깨달았다. 어머니가 왜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비옷을 벗지 말라고 하셨는지를.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흥건하게 젖어버린 바지가 허벅지에 달라 붙어 걸을 때마다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 같았다. 책보자기를 든 팔이 저렸고 시도 때도 없이 속눈썹에 매달리는 빗방울때문에 길이 보얗게 보였다. 비를 맞고 추위에 떨고 있는 생쥐를 본 기억이 되살아 났다. 비 맞은 생쥐. 참으로 볼성 사나운, 초라한 모습이었다. 나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다. 수업을 마치고 귀가한 나는 밤새도록 기침과 고열에 시달렸다. "너 이 녀석, 비옷 입지 않았구나?" 설거지도 미룬 어머니는 내 이마에 찬 물수건을 얹으며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흐르는 눈물만 삼켰다. "울지 말고 저녁 먹어야지. 형은 미워하지 마라." 어머니는 밤이 늦도록 내 옆에 앉아 온 몸을 다독거렸다. 내가 비옷을 벗어 버린 것을 그 때 어머니는 어떻게 아셨을까? 형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왜 하셨을까?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지난 일들을 되새기며 자문자답을 하고, 고향에 계신 어머님께 전화를 걸어 묻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 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서 내가 부모가 되었을 때, 나는 알 수 있었다. 부모란 자식의 얼굴만 보아도 낮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듯이 형을 미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도 어린 내 가슴속에 가족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게 될까 봐 그러셨던 것을. 십여 년의 세월이 더 흘렀다. 고향에는 팔순이 가까워진 노모가 홀로 계신다. 마흔 다섯이라는 나이를 먹도록 세월을 맞이하고 보내면서 나는 그 옛날의 아이들과 형처럼 살아왔다. 날씨가 춥다며 여러 겹의 옷을 끼어 입으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촌스럽다고 웃어 넘겼고, 유치원 아이들이 쓴 것 같은 어머니의 편지를 보면서 소학교도 못 나온 어머니가 창피했으며, 이웃친지들이 겪는 아픔과 슬픔을 조금은 나누어 질 수 있었는데도 내게 짐이 될까 봐 몸에 붙은 벌레처럼 귀찮아 했고, 장애자인 친구를 만나면 나는 정상인이라며 우쭐대며 잘난 체했다. 돌이켜 보면, 내가 무지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도록 입고 싶은 옷 입지 못하고, 드시고 싶은 음식 드시지도 못하고 학교에 보내 준 분은 소학교도 못 나온 어머니였으며, 이민생활에 지칠 때면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며 고국소식을 듬뿍 안겨 준 사람들이 바로 이웃이다. 그리고 나에게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이가 그 장애자 친구였던 사실을 잊고 살았다.오늘은 종일 비가 내렸다. 비옷을 입고 골목길을 나서던 날, 아이들의 놀림과 형의 도끼눈을 어머니는 짐작하고 계셨으리라. 우산하나 살 돈이 없어 밤새 재봉틀을 돌려 비료포대로 비옷을 만들어 입혀 주시던 어머니의 미안함을 예전에 알았어야 했다. . . . 뉴저지 포트리에서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