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말단이던 시절, 남편의 해외근무를 따라 외국에 간 여편은 사모님이 시어머니보다 무서운 줄 미처 몰랐다.
공항에 남편의 동료가 마중을 나왔고 그날 저녁은 자기집에서 준비했으니 자기집으로 가자고 하였다.
그 집에 가자마자 남편 동료의 부인은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여편에게 수화기를 주면서 말했다.
"사모님이예요. 잘 도착했다고 인사드리세요."
여편은 당황했다.
남편에게 대충 듣기는 했지만 한번도 본 적도 없는 사람, 여러 사모님 중의 누군지 구분도 안되는 사람에게 무어라 말을 한단 말인가?
아무튼 전화기를 넘겨받고 여편은 어정쩡하니 말했다.
"여보세요,..."
다행히 상대방은 상냥한 목소리로 먼저 오느라고 수고했다, 잘 쉬어라, 곧 만나자, 뭐 이런 요지의 말을 하고 여편은 그저 대답만 하면 되었다.
그 전화를 통해 사모님들이 생각보다 더 부드럽다고 느낀 여편은 마음이 놓였다.
며칠 후 남편의 동료 부인은 여편을 데리고 2번사모님 댁으로 인사를 갔다.
여편이 사모님으로 모셔야 할 남편의 상사 부인은 네 사람이 있었다.
편의상 직급 순서대로 1,2,3,4로 호칭하기로 한다.
여편의 순서는 다섯번 째라 할 수 있지만 5번, 6번, 7번은 도토리 키재기니 굳이 순서를 따질 것은 없다.
아무튼 2번은 1번을 제외한 다른 여자 모두를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하였다.
쉽게 말하면 남편이 해외근무를 하는 동안 여편이 지켜야 할 행동수칙 같은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한번 이상 들어서 알고 있는 것들이었겠지만 여편이 새로 온 김에 서로 인사도 시킬 겸, 다시 한번 행동수칙에 대한 교육을 강화할 겸, 그런 자리로 느껴졌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내용들도 있었지만 동의하기 힘든 내용도 있었다.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 이상 사모님 댁에 안부전화를 하라,
가능하면 아침마다 전화해서 오늘 특별한 일은 없는지 확인한 후 개인 일정을 정하라.
여편의 마음에 불편함이 스쳤다.
시어머니에게도 그렇게 해 본 적이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 전화를 통해 느낀 것이 터무니 없는 착각임을 알았다.
여편은 공손한 태도로 듣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서 그런 말은 무시하기로 맘 먹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여편의 청개구리 심뽀가 발동한 것이다.
다시 2번 사모님 댁에서 2차 회동이 있었다.
이번에는 2번 사모님이 좀 흥분했다.
그날 여편은 6번이 2번에게 당하는 것을 보면서 아무리 말단의 부인이지만 저렇게 당하고 참는 것은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화살은 직접적으로 여편을 겨냥하진 않았지만 내용으로 보아 여편을 질책하는 말이었다.
여편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절 두고 하시는 말씀 같은데요..."
"눈치는 빨라서 좋구만..."
그날은 그렇게 끝났다.
아마 처음이라고 봐 주는 모양이었다.
그리고도 여편은 공식적인 행사가 아닌 사적인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남편의 동료 부인인 6번의 말에 의하면 여편은 그 모임의 가십대상이라고 하였다.
6번은 여편에게 씹히지 말고 전화도 자주하고 사적인 모임에도 빠지지말라고 하였지만 여편은 그 충고를 무시했다.
그러던 어느날 6번이 말했다.
드디어 여편은 가십의 대상에서 조차 제외되었노라고...
그렇게 계절이 바뀌고 새해가 되었다.
새해가 되어 직원 가족들 모두가 1번의 집에 모였다.
그날 2번은 화가 나 있었다.
여편은 그 이유를 다른 여자를 통해 들었다.
2번 집에 새배를 안 가서란다.
이번에는 여편만 빠진 것이 아니고 모두들 미처 생각을 못해 못 갔다고 하였다.
얼굴 가득 불만스런 표정으로 다니는 2번을 보고 여편이 말했다.
여전히 배시시 웃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 사모님! 화 나셨어요? 그러시지 말고 말씀하시고 화 푸세요오~"
여편은 행동과 달리 말은 애교가 넘치는 여자다.
아마 이런 여편의 말에 2번의 화가 폭팔한 것 같다.
2번은 마음 속에 있던 불만을 쏟아내었다.
물론 말되는 소리도 있었지만 말이 안되는 터무니 없는 억지도 있었다.
2번이 화를 쏟아 낼 동안 1번도 그 자리에서 다 듣고 있었다.
여편이 억지라고 느끼는 것들이 1번 귀에는 어떻게 들렸을까?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소리로 들렸는지도 모른다.
2번의 말이 끝나자 1번이 교통정리에 나섰다.
결론은 자주 만나면 말썽이 많으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쓸데없이 모여 말썽부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날 1번은 모두를 야단치는 것 같았지만 제일 꾸중을 많이 들은 것은 단연코 2번이었다.
그 날 이후 2번의 위상은 많이 약화되었다.
아마도 1번이 그 날 2번의 말을 듣고 생각을 달리 한듯 예전 같으면 2번과 상의할 일을 3번이나 4번과 상의 하는 일이 늘었던 것이다.
얼마 후엔 공개적인 자리에서 2번이 1번에게 심한 꾸중을 듣은 일까지 생겼다.
한번 눈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니 2번이 하는 일이 1번의 눈에 자꾸 거슬렸던 모양이다.
물론 여기에는 4번의 고자질도 한 몫 단단히 하긴 했지만...
그러다가 2번의 가족은 귀국길에 올랐다.
해외근무 중 상사의 부인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들 하는데 그런 점에서 2번은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 격이 되었다.
2번이 귀국하고 몇달 후 여편과 친하게 지내는 남편의 다른 동료 부인이 전화로 여편에게
알려주었다.
2번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아무래도 그 때 새해인사 문제로 자기가 이성을 잃은 것은 여편의 꼬임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그 말을 듣고 여편은 하하 웃었다.
이제야 알다니...
여편은 속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사모님! 맹세코 고의는 아니었답니다. 제가 워낙 타고 난 여우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리 된 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