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어머니와 남편이 시부모 회갑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다소곳한 여편,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집에서 할까, 음식점에서 할까 의논이 분분하더니 집에서 하는 쪽으로 의견이 기우는 것 같았다.
당황해진 여편, 다소곳한 여자 역할을 버리고 한마디 참견을 하였다.
비록 참견을 하긴 하지만 최대한 공손한 목소리로 공손함의 효과를 더하기 위해 약간 느리게 이렇게 말했다.
"음식점에서 하면 안될까요? 전 집이 서울이라 아이들 때문에 미리 와서 도와드릴 수도 없고, 작은어머니랑, 가까이 사는 동서만 힘들텐데..."
그 말에 남편이 퉁명스런 목소리로 면박을 준다.
"당신이 뭔데, 나서고 그래?"
그 말을 들은 여편은 얼굴이 화끈함을 느낀다.
이런 때는 말을 아끼는 것이 좋다.
이빨로 아랫입술을 꼭 물고 고개를 숙여 행여 변한 얼굴빛을 눈치 채이지 않게 조심하고 조용히 일어서 밖으로 나왔다.
마루에 서서 먼데 산을 보고 우선 분한 마음을 삭히기 위해 한숨을 한번 쉰 다음, 방안에 있는 사람에게 들키지 않게 조그맣게, 신발을 찾아 신고 마당으로 나섰다.
화장실 가는 척 하기 위해...
화장실 가는 길에 여편은 마음에 새겼다.
'그래, 내가 뭔데...내가 뭐냐구?'
자기가 뭔지 곰곰 생각해 볼 일이라고 여편은 마음을 정했다.
여편은 여우 같은 며느리다.
시집에 안부 전화를 가끔해 시어머니하고 장단을 맞추기도 하고 시할머니에게 애교를 떨기도 잘 한다.
그리고 남편이 퇴근해서 돌아오면 재잘재잘 시부모 안부를 전해주곤 하였다.
남편은 자기 부모건만 스스로 전화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여편을 통해 간접적인 효도를 하고 살았다.
그런 여편이 시집에 전화하는 일을 그만 두었다.
한 달, 두 달...,
남편이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 챈 것인지 이렇게 말했다.
"집에 전화 좀 하지."
"나는 안해. 당신이 해, 내가 뭔데 전화를 해..."
이런 때 여편의 목소리는 착 깔아지고 힘이 들어가 있다.
무게잡기 좋아하는 남편도 이런 때는 여편에게 한 수 밀린다.
"왜 그래?"
"당신 잊었어? 지난번 작은어머니랑 회갑잔치 이야기 할 때 그랬잖아, 나보고 뭔데 나서느냐고..."
남편은 할 말이 없다.
동서가 전화를 했다.
"형님, 어머니에게 전화 좀 드리세요. 많이 궁금해 하시던데..."
여편은 동서에게도 조금 섭섭한 마음이 있다.
동서가 옆에 살면서 힘든 것은 알지만 지나치게 생색을 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여편이 며느리의 역할을 소홀히 하고 싶어서 소홀히 하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외국에 근무하거나 시집과 떨어져 살아 못하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 그러는 동서가 얄미운 생각도 들었다.
동서도 여편이 얼마나 시집 경제에 열성을 다해 도왔는지 못들었을리는 없을터인데 말이다.
여편이 힘든 일이라고 회피하는 사람이 아닌 것도 충분히 알만했는데...
그날 회갑연 문제도 동서가 평소 지나치게 힘들다는 생색만 내지 않았어도, 시어머니가 그런 동서 편에 서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않았어도, 여편이 참견을 안했을런지도 몰랐다.
여편은 동서의 전화에 조금 쌀쌀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동서는 상관 하지마.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어머니가 궁금하시면 먼저 전화하시겠지. 동서가 나설 일이 아니니까 모른척 해."
동서는 기어드는 소리로 '네~'하고 전화를 끊었다.
시부모 회갑이 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시부모는 동갑이라서 시아버지 생일 날 같이 회갑연을 하기로 했었다.
남편은 초조해졌다.
맏며느리인 여편이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있으니 애가 탔다.
"여보, 어머니 아버지 회갑은 어떻게 하신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뭔데? 난 남의 일에 참견 안해. 난 몰라."
남편의 참을성은 거기까지다.
"당신 도대체 왜 그래?"
버럭 화를 내며 목소리가 높아진다.
"당신 정말 몰라?"
여편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는다.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 거리듯 말한다.
여편의 눈은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
여편의 참을성도 여기까지다.
활활 타오르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흐른다.
그리고도 남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남편을 노려보더니 안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당황한 남편이 뒤따라 들어간다.
여편을 이해하지 못한 남편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화가 남아 있다.
여편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며 물었다.
"당신, 정말 왜 그러는 거야?"
한숨을 길게 몰아 쉰 여편이 돌아서더니 속사포처럼 쏟는다.
"정말 몰라?
그럼 그 이유를 말해 줄테니 한번 들어 볼래? "
여편의 입에서 결혼하고 십여년동안 쌓인 남편의 비리가 줄줄이 흘러나온다.
자기가 한 일이지만 남편이 차마 듣기 민망한 소리들이다.
남편은 기억조차 희미하거나 아주 잊어버린 일들도 수두룩하다.
남편은 그런 일들을 여편이 가슴에 꼭꼭 쌓아두고 사는 줄 몰랐다.
그저 잘 웃고 농담 잘 하고 애교도 많고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고 행복해 하는 줄만 알았다.
그날 밤, 남편은 여편에게 결혼하고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울면서 용서를 빌어야 했다.
'당신이 뭔데?' 한마디 한 것의 댓가 치고는 혹독한 것이었다.
하지만 부모의 회갑연을 치루려면 별 수 없었다.
그 후 남편은 '당신이 뭔데?'를 결코 입에 담지 않았다.
여편도 '내가 뭔데?'라고 묻지 않았다.
남편이 여편이 뭔지 그만하면 충분히 알았을 것도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