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이혼 소송을 하고 있는 중 배우자의 동의 없이 시험관 시술로 아이를 임신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574

11월이 오듯...낙엽이 지듯...


BY 개망초꽃 2004-11-05

7층 아파트에서 내려다 본 거리는 늦가을 색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아무도 없는 집안의 현관문을 닫고 열쇠로 채우고 나서
뒤를 돌아 복도식 아파트 난간에 서서 습관이란 참 버릴 수 없듯이,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게 된다.
바로 밑엔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두 줄로 서 있다.
일산 신도시가 생기면서 이 아파트가 다 올라서서 입주를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저 가로수는 심어졌을 것이다.
나무와 나무 사이가 나무 앞과 나무 앞 사이가 갈색 천 퀼트 이불처럼 이어져있다.

늦은 아침에 일어나니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남편에게 온 문자였다.
“오늘이 결혼 19년이네, 미안해, 잊을 수가 없어.”
핸드폰을 손에 주고 잠시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19년전에도 지금처럼 가을이 열렬하게 물들어 있었고,
우리가 결혼했을 순간에는 나뭇잎은 훌럭훌럭 떨어지고,
헤어지던 그 해에도 나무는 미련없이 왔던 땅으로 흩어져 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세수를 하고 출근 준비를 하면서 열아홉이란 숫자가 떠나질 않았다.
상아 나이가 열아홉이지, 화분을 올려 논 장식장도 19년이 되었네,
삐딱하게 서 있는 옷걸이도 19년을 나와함께 살았구나.
11월2일이라는 결혼 날짜가 침대머리위에 걸려 있는 달력에도
11월2일이라는 숫자만 도둘아져 보였다.
핸드폰을 열어 볼때마다 그 날짜가 내 눈동자만 주시하고 있었다.
허둥지둥 구두를 신고 문을 채우고 뒤 돌아 아파트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날처럼 가을이 갈색천으로 조각조각 조각이 나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소형 복도식 아파트는 승강기가 두 대 있다.
제일 가까운 승강기가 7층 이하로 내려가고 있으면
복도를 따라 걸어서 맞은편 승강기로 간다.
오래된 이 아파트는 모든 것이 낡아 문들어졌는데
승강기만은 새로 고쳐서 스텐레스 냄비 엉덩이처럼 빤질빤질하다.

밖은 비가 연하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펼까 말까하다가 우산 아래의 그늘진 운치가 좋아 우산을 폈다.
땅으로 떨어지는 계절 11월,
플라타너스 잎은 너져분한 방석이 되어 정신산란하게 흩어져 있었다.
은행잎이 떨어진 자리는 샛노란 상큼함이 발끝에서 머리 위까지 전해진다.
느티나무는 떨어진 잎보다 달려 있는 잎이 많아 끈질김이 덕지덕지 붙어있어
앙상한 11월이 덜 앙상하게 보였다.
세잎으로 갈라져 세잎단풍잎이라는 나무는 세가지 색으로
조화를 이뤄 환상적으로 분위기를 이끌어 내고 있었고,
어제부터 비가 와 있어서 거리는 온통 여러 가지 나뭇잎 색으로
인도를 칠하고 또 하고 겹겹으로 칠하고 있었다.

11월이 되어 가지고 있는 거 아낌없이 내어주는 나무를 보면,
나는 가진 것이 열손가락으로 셀만큼 많다.
건강하고 별 말썽없이 커가고 있는 아이가 둘,
모든 사람 떠나도 날 지켜주는 엄마 하나,
내 사건처럼 아파하고 도닥여 주는 남동생 둘,
속에 있는 말과 지금의 형편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는 이모 둘,
남편 허물부터 숨겨둔 애인까지 뻔뻔하게 고백할 수 있는 친구 셋,
나는 이토록 많은 걸 내 열손가락에 걸어 두고 있으니
욕심이 많은 인간이기 전에 의타심이 강한 여자이기도 하다.

자신이 태어나 돌아온 땅으로 남김없이 던지고 있는 나무를 보면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아서 떨어지고 있는 11월이 아까워서 안타깝다.
몇년안에 숲해설가 공부를 해서 숲해설가가 되고 싶은 것과
들꽃에 관한 슬픈추억을 써서 수필집을 내고 싶은 것과
시골에 작은 집을 지어서 온통 들꽃으로 채우고 싶은 것,
중년이 되어 주머니가 털털 비어 있으면서도 하고 싶은 게 많아 내 스스로 나를 조르게 된다.
바람에 쓸리고 사람발에 채어 쓰레기 봉지 속으로 들어가는 낙엽이,시간으로 보여 안타깝다.

문자에 써 있듯이 오늘은 의미있는 날이었다.
남편과 헤어지면서 버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결혼식 비디오가 그것이었다. 웃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던 나와는 반대로
연실 웃고 있어서 그럼 첫딸을 낳을거라고 놀리기도 했었는데, 정말 첫아인 딸이였다.
그리고 또 버릴 수 없는 것이 19년 세월이 그대로 확인되는 사진들이었다.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고 학교가고 졸업하고,그 옆엔 항상 내가 있고 아이들 아빠가 있었다.
또 하나가 더 있다면, 대부분 떨어지는 단계를 준비하는 늦가을이 그것이다.

19년째 맞는 가을은 하늘위에 달린 나뭇잎도
땅아래로 떨어진 나뭇잎도 비에 젖어 차분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