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날 두문불출 했더니 여기저기서 전화통에 불이 난다
수화기 들 기운도 없는데 목소리도 완전 맛이 가서 말하기도 쉽지 않은데
수화기 건너편에서 흘러나가는 내 목소리를 듣고서야
어~이그 또 궁상떨고 있지.......? 감기를 무럭무럭 키우는 사람은 세상에 너 뿐일 거야
수화기 건너편에서 친구의 질책이 따발총처럼 울려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병원엔 절대 가지 않을 작정이다.
감기 몸살 나서 죽었다는 사람 못 봤으니 깡으로 버터야 한다.
친구가 감기에 좋다며 배 즙을 한 박스 놓고 간 그것만 내내 들이키며
올 스톱된 바깥일들을 오랜만에 신경 쓰지 않았더니 홀 가분 하기는 했다.
나 하나쯤 앓아누워 아무 일 하지 않아도 세상일은 잘만 돌아가고
지구 건너편에서는 대통령까지 뽑았다.
그러고 보니 세상 중에 나는 티끌만큼도 아니 먼지만큼의 보이지 않는 미미한 존재임에
약간은 허무하고 덧없다는 생각이 앓고 있는 며칠사이에 실감하면서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위치를 생각게 했다.
미련을 떨다 고생을 싸서 한다고 남편이 뭐라 그래도 난 고집을 꺾지 않는다.
정말 그렇다 난 병원 가서 항생제 잔뜩 들어있는 약은 정말 먹기 싫다.
집에서 나름대로 조치할 약이 없을까 하고 동생에게 전화를 했더니
한약을 조제해서 부쳐준다며 날 더러 감기하고 내기하는 사람 같단다.
며칠 무리를 했나보다.
시부 기일 날에 앞서 이틀정도 더 시간을 내서 시모를 모시고 온천을 시켜드리고 싶었다.
봄에 날짜까지 다 잡아놓고 온천지 숙박까지 다 예약해 놨었는데 예정에 없던 회사일 에
문제가 생겼다며 남편이 펑크를 내는 바람에 온천을 시켜드리지 못 했었다.
시모는 괜찮다고 하셨지만 서운한 기색이 많았다는 걸 눈치 못 챌 내가 아니다.
모처럼 만의 가을정취를 어머님은 무척 좋아하셨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핑계로 자주 이런 기회를 만들지 못한 불찰이 내내 무거웠다.
오랫동안 차를 타면 어지러워하시는데 그런 기색 없이 행복하신 모습에 얼마나
다행이던지
내가 또 언제 이렇게 나들이를 해 보겠냐고 기약을 못하시는 모습에서 마음이 시렸다.
건강만하시면 또 모시고 오겠노라고 했더니 힘없이 웃기만 하셨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가을걷이를 했다.
고구마도 캐고 홍시 감도 따고 녹차가 겨울동안 얼어 죽지 않게 지푸라기도 깔아주고
조금씩 이나마 친척들 이웃들 나눠주고 나니 힘겨웠었나보다
몸이 신호를 보낸다. 좀 쉬라고
그리고 곧 바로 들어 누워 일어나질 못했다.
밥은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지만 오븐 기에 노릇노릇 구운 군고구마는 대추차와 함께
먹을 만 해서 하루 종일 고구마만 먹었다.
후배가 호박죽이라도 먹어라 며 끓여 준 죽 맛이 쓴 소태맛이다.
좌판을 두드리며 창밖을 내다보니 아직은 공원 안에 단풍이 볼만하다
올해처럼 곱게 단정하게 색을 보여준 적이 드물었던 것 같다.
재비보다는 크고 비둘기보다는 작아 보이는 새가 내 창 아래서 가을노래를 열심히
부르고 있다.
무슨 새인지 모르지만 내게 생기를 주는 세레나데를 들려줘서 너무 고맙다.
요즘은 모든 게 새롭게 의미 있게 보인다.
질서 없이 흐르는 한 떼의 구름도, 햇살에 나부끼는 은빛 억새의 흔들림도,
정처 없이 나뒹구는 갈잎의 소리가 가슴을 갉는 소리 같아 마음이 시려오기도 한다.
누가 그러더군 세상이 새롭게 보이면 그때부터 나이를 실감한다고
딸아이가 전화를 했다
며칠 후에 있을 내 생일에 무슨 선물을 받고 싶냐고
아주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진 젊은 팝페라 가수의 cd를 사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딸아이는 엄마 가을 타나봐 하며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