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옥이 오랜만에 저울을 보며 생각했다. 한 때 불이 나도록 저기 오르내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 그리고 언제부터였을까.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아도 살만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드라마에서 죽고 못 사는 사랑 이야기가 나오면 그건 아니라고 한 수 가르쳐주고 싶어지기도 하다.
예상보다 훨씬 나빴다. 그래도 설마 했는데 저울 눈금은 사정없이 돌아 듣도 보도 못한 숫자를 가리켰다. 그에게서 연락이 끊어진 겨울 내내,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봄 내내 정옥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이상하게 단 것이 당기기도 했다.
줄여 입어야 맞았던 옷들을 못 입게 되고 커서 못 입던 옷들을 입게 되었다는 걸 느끼면서도 그런가보다 했다. 옷을 입어서 살이 접히기 시작하는데도 그러려니 했다. 그가 없는데 옷매무새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가 했던 한마디가 툭 튀어 나왔다. 마른 사람보다는 그가 했던 한마디가 툭 튀어 나왔다. 마른 사람보다는 퉁퉁한 사람이 좋지.. 그랬을까? 그는 지금의 정도의 몸을 좋아했을까?
불어나는 몸무게를 처음엔 주위 사람 아무도 몰랐지만 점차 주위에서도 알게 되었다. 서른 중반답지 않게 날씬하던 몸. 기분이 좋으면 그에게 업어달라고 해도 부끄럽지 않던 몸이 디룩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렴 어떠랴. 무심하게 "나도 살이 찔 수 있구나. 세상 사람들 다 찐다는데 나도 찐들 어떠랴" 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가 못 알아볼 정도로 살이 쪄간다고 생각하면 잠시 긴장했지만 곧 다시 만날 일도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그와의 만남이 어찌 필연이 아닐 수 있으랴. 전철을 타고 가면 옆자리에 앉는 남자가 어찌 그 하나뿐이랴. 정옥은 처음 그를 만난 날을 생각해본다.
2
차창밖 해질녘 풍경이 아름다웠다. 끝까지 가는 정옥은 자리를 옮겨 구름이 더 잘 보이는 쪽으로 옮겨 앉았다. 구름은 바람과 지는 해를 따라 갖가지 모양으로 빠르게 변했다. 그러기를 한참 해는 서산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혹시 한 번이라도 더 그 붉은 빛을 보여주지 않을까 했지만 매몰차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옆자리에 손이 보였다. 널찍하고 알맞게 살이 있고 단정한 손. 그때였나 보다. 정옥의 마음에 사랑이 다시 온 것은.
정옥이 사람을 볼 때 손을 먼저보고 많이 본 것은 주욱 가져온 습관이다. 정옥의 엄마가 정옥이에게 너는 손이 길어 게으르다고 했고 정옥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손이 길으면 게으르다고 했는데 손이 기니 절대 부지런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손톱이 뱀처럼 납작한 사람은 재주가 많다고들 했는데 정옥이 아는 한 언제나 그들은 재주가 많았다. 손가락이 짧은 사람들은 바지런하다고 했는데 그것도 언제나 그럴 듯하게 맞아 들었다. 얼굴을 아는 누구나 그 사람의 손을 기억할 수 있었다. 손은 참 여러 가지 모양이었다. 긴 손 짧은 손 넓적하고 짧은 손 길고 넓적한 손 . 답답한 손 . 여린 손 .. 고운 손 ..잔 주름이 많은 손.
정옥을 스쳐지나간 어떤 이의 손은 생긴 건 마음에 들었지만 겨울엔 차가왔고 여름에는 땀이 나 잡을 수가 없었다. 만약에라도 그가 따뜻하고 땀이 나지 않는 손이었다면 그리 쉽게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먼저 그의 손을 보고 다시 그를 보게 되었다. 안정감있는 손이었다. 갑자기 그가 말을 했다. 저수지 가려면 어디서 내려야 하나요? 정옥이 막 대답하려는 찰나 저쪽에서 대답하는 소리 ' 다음에서 내리면 돼요'
3
나중에 그와 함께 일어날 일은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그와 그 여자와 정옥이
그는 정옥에게 너와 친구이듯 그 여자와도 친구라고 말했다. 또 정옥을 친구라고 부르면서도 사랑한다고 하기도 했다. 그런 태도가 정옥을 더 애달프게 했다. 보고만 있어도 따뜻해지는 손이 갖가지 기술을 가졌다는 것이 정옥을 더 안타깝게 했는지 그의 모호한 태도가 정옥을 더 안타깝게 했는지는 모른다.
정옥에게 그는 빛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정옥이 가지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가 가진 따뜻한 손은 정옥이 잡고 싶어 했던 손이다. 그를 알게 되면서 정옥은 세상이 기쁘다는 것을 알았고 사랑이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날 정옥이 친구에게 물었다. 그를 잃고 내가 살 수 있을까? 친구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엄'
친구의 대답은 매우 생소했다. 정말 그가 없이도 살 수 있을까?
정옥은 이제 친구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 까닭을 알게 되었다. 사랑 때문에 가슴 아프다는 젊은이에게 다 지나가는 거라고 나중에 알게 되는 거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그를 만난 후 퍽 오랜 세월이 지났다.
늘 그립기만 하던 그가 조금씩 야속해지고 미워지기 시작했다. 가끔씩 무심해지는 자신을 보며 그의 마음이 이랬던 거라고 짐작해보기도 한다. 아직도 그를 향해 혼잣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겨낼 수 있으리란 것을 안다.
아침을 먹지 않은 정옥이 친구가 가져온 페스츄리를 한 개만 먹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나 더 먹고 싶었지만 아까 본 저울 눈금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정옥은 예감했다. 그를 만나기 전과 후로 구분되던 시간이 이제부터는 그와 만난 후와 헤어지고 난 후로 구분되어지리라는 것을 ..... 잘 생긴 손은 잘생긴 얼굴처럼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