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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야기) 인연은...


BY 영이 2004-09-09

1984년의 그 어느날....

 

사장비서실에서 근무를 했었던 난 사무실 직원들과는 접촉할일이 많지 않았었다.

사장님이 전해주신 서류를 가지고 상무님실이나 또는 가끔 사무실을

가는것 빼고는 사무실로 나갈일이 없었다.

 

내나이 23세.

당연히 회사에 누가 멋있고 능력있고 매력이 있는가에 대한 관심이 왜 없었으랴.

하지만 총각사원을 접촉할 일이 별로 없었던 아쉬운 나날들..

입사후 얼마되지 않은때라 일에만 전념을 하며 그래도 나름대로 재밌게 보내었었다.

 

어느날, 상무실 비서가 내게 와서 부탁을 한다.

"언니! 이번주 토욜에 회사 야구부 시합이 있거든요? 나랑 같이 가요"

이유인즉...

자기 맘에 드는 남자가 시합을 하는데 마침 집이 그 남자와 자기와 같은 방향이고

또한 나도 같은 방향이니까 시합끝나고 같이 집쪽으로 가다가 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거였다.

 

생각해보니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직원들과도 접할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을하고

쾌히 승락을 했었다.

 

토요일...

시합을 구경하고 계획했던대로 우리 셋만이 같이 영등포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가면서 난 자연스럽게 얘기를 했다.

"우리 차나 한잔씩 하고가죠?"

 

영등포의 어느 까페에 자리를 잡고 차를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난 내 할일을 해야했다.

둘만의 시간을 주어야 했기에...

"어머! 잠깐 잊었네요. 오늘 다른 약속이 있었는데.. 미안해요. 먼저 실례할께요"

 

당연히 상무비서는 아쉽다는듯한 거짓웃음으로 내게 잘가라는 인사를 했고...

그 남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더니 대뜸 같이 일어나죠 하며 일어난다.

 

어! 이러면 안돼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순간 난 그남자를 자리에 앉히며 한마디했다.

"지금 같이 일어나시면 제가 죄송하잖아요. 저때문에 좋은 분위기 망치면 안되죠..

아이구... 바보같이 약속도 잊어버리고... 두분 좋은시간 되세요" 하고는 도망쳐나왔다.

 

뒤가 왜그렇게 씁쓸하던지..

하지만 어떠하리.

이렇게 한커플 탄생하면 서투른 내 거짓이 눈에 다보여도 그게 뭐 대수랴...

 

그렇게 시간은 지나갔고...

그다음주 어느날 상무비서가 내게 와서 하는말.

"언니! 근데 이상하다. 언니가 사무실에 지나가면은 그사람이 언니를 한참 쳐다본다?"

눈에 훤히 드러나 보이는 거짓을 한터라 그사람이 나를 한심한 사람으로 쳐다보는거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며칠뒤 토요일.

아침에 출근을 하며 회사정문앞에서 문을 열려는 순간 옆에 누군가 다가오며 말을 건낸다.

"오늘 오후에 시간좀 내주시죠"

그사람이었다.

 

왜 내가 죄지은 사람처럼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충분히 그런일을 만들수도 있는거아니던가...

청춘남녀들의 사랑놀음에 내가 다리를 놔준것뿐인데.

난 어쨌든 한번은 얘기를 해야할것같은 알수없는 분위기에  그러죠 라고 대답을 했다.

 

오후에 우리는 명동 롯데백화점앞에서 만났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오비스캐빈이란 생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내게 그날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않았다.

단지...

 

"그동안 김영희씨를 쭉 지켜봐왔습니다. 제게 기회를 주시지요"

숨이 꽉 막히고 이건 아닌데 하는 오만가지 생각이 내머릿속을 휘저었다.

속은 엉망진창이었어도 겉으로 나는 차분하고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이후...

회사의 구석구석 그 어느곳에서든지 나를향해 눈길이 머무는 사람이 있다는것을 난 느낄수 있었다.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

 

상무비서는 영등포에서의 만남뒤로 그사람을 포기했다고 한다.

나이차이도 있고 자기가 감당하기엔 너무 어른스럽다나...

워낙 밝고 여우기질을 갖고있었던 그녀는 그새 다른사람을 쫓아 방향을 바꾸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몇달을 보내면서 난 회사의 산악회란 곳에 가입을 했다.

운동을 좋아했던 그사람 역시 그곳의 일원이었다.

1박2일로 소백산행이 있었다.

기진맥진 난 첫산행의 어려움을 몸으로 느끼며 힘들게 올라가는중 어디선가 들리는 노랫소리.

그때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란 TV드라마가 한창 인기를 끌었던 때였는데 타이틀곡을

부르고 있는게 아닌가~~

자연스럽게 난 그에게 눈길이 갔고 그렇게 그사람을 내맘에 담기 시작했다.

이후로 그는 내게 몇번의 프로포즈를 했었다.

 

하지만 난 쉽게 마음을 내보이기 힘들었었다.

시작이 내몫이 아닌 옆의 상무비서였기에.

비록 그녀와는 아무런 연결도 되지 않았지만.

일말의 어떤 책임감이랄까...

 

계속 몇번의 산악모임이 있었다.

어느날인가...

산행후 뒷풀이로 강남의 어느 디스코클럽을 가게되었다.

남직원 5명정도와 여직원 대여섯명정도.

그남자 돌아가며 여자들과 한번씩 브루스를 추면서 내겐 신청은 물론 눈길한번을 주지 않는다.

 

섭섭함이 드는 이 감정이 뭐란말야...

싫다고 내가 거절해놓고 지금와서 내가 뭐하는 짓인가...

 

클럽을 나와서 집으로 가는데 버스정류장에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근데 갑자기 그남자 내게 잘가요 하며 자기버스에 올라탄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 혼자만 그깜깜한 밤거리에 남겨두고 가버렸다.

 

남자 맞아?

별꼴이야.

정말 치사하다....

클럽에서도 그랬고 나와서도 내게 야속하게 하는 그사람이 정말 미웠다.

그렇게도 미운맘이 들어서 다시는 쳐다보지 않을꺼야 하고 다짐에 다짐을 했다.

그랬는데...

 

다음날 회사에서 나란사람은....

서류철속에 쪽지한장을 끼어 사무실로 유유히 걸어나가 그사람 책상에 살며시 올려놓고 오는 행동을 했다.

"오늘저녁 시간있어요?"

 

한참을 기다렸다.

퇴근도 못하고...

드뎌 전화가 왔다.

만나자고~~~

 

그날 이후로 우린 남의 눈을 피하며 서로에게 충실히 사랑이란 감정을 쌓아가며

만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우린 결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만나게 되었다.

 

영등포의 스완이란 술집이었던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곳에서 난 그에게 나에대한 얘기를 했다.

사랑을 키워가며 우리에 관한 얘기는 많이했지만 나 자신에 대한 얘기에는 솔직할 수 없었던 나.

 

하지만 시간을 놓치면 안될것같은 생각이 들었었다.

더욱 사랑이 깊어지기전에 나의 모든것을 얘기하고싶었다.

항상 나를 짓누르고 있었던 문제에 대해서.

 

"나는 당신을 만나기전에 사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와는 아주 깊은 관계까지도 갔었지요.

그리고 또한가지.

내겐 아픈오빠가 있습니다.

평생을 돌봐줘야하는 사람입니다."

 

내말을 듣자 그사람 가만히 내얼굴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지난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겐 지금의 영희씨가 나를 사랑해주는 그맘이 소중합니다. 그리고 오빠문제는 별것아니네요. 뭐 그런거 가지고 고민을하세요"

 

1년반뒤 우리는 결혼을 했습니다.

이제 결혼한지 18년이 되었네요.

정말 그가 말했던대로 그사람은 내게 단한번도 헤어진 그사람에대한

얘기를 한적도 없었고

지금은 요양원에 가있는 오빠를 바라보는 내 아픔을 잘 위로해주며

옆을 지켜주고있습니다.

 

가끔은 생각을합니다.

상무실비서가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의 남편을 만날수 있었을까?

우리의 만남에 가교역할을 해준 그녀는 지금 어디에서 잘 살고있는지...

후후후..

 

인연이란건 살며시 다가와 자리를 잡아놓고선 조용히 운명을 만들어놓고 가버리는 도둑인가봐요.

살고보니 맘속에 이는 추억은 살아가는데 정말 소중한 보약이 되더군요.

때로는 밉고 보기싫고 한게 부부겠지요.

이럴때 도둑같은 인연을 살며시 떠올리면 그때의 내 남자의 모습이 떠올라 남편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사람인가 하며 가슴한쪽이 작은 파동을 일으킵니다.

 

나이들면 추억으로 먹고 산다는말.

점점 느낍니다.

내나이가 40을 넘어섰고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음을 요즘 많이 느낍니다.

추억을 통해서..

인연을 통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