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3박을 하고
밀라노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주로 밤에 기차를 타 피곤한 잠을자고 일어나면
아침에 딴나라에 도착해 부시시 눈비비고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다가
낮에 기차를 타고보니 창밖 풍경도 구경하고
전날밤 삶아놓았던 계란도 까먹고
아이들과 이야기도 나누니
아, 이거야말로 여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이유인지
기차가 중간에 가다서다 그러더니 30여분 연착을
하는 바람에
밀라노에서 스페이즈로 가는 기차를 타기까지 3시간정도 사이시간에
밀라노 시내로 나가 아름다운 성당 건물이며
유명한 그림, 최후의 만찬을 보려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말았습니다.
차타고 시내 나가고 길찾고 조금 돌아다니다 보면
스위스로 가는 기차를 놓칠런지도 모르겠고
집떠난지 2주쯤 되다보니 아이고 어른이고 모두 지쳐서
틈만 나면 앉아 쉬려는 꾀를 부리게 되더군요.
밖에 나가서 식당 찾는것도 귀찮아서
남편혼자 나가 먹을걸 구해 오라 해놓고
나머지 네식구는 가방을 끌어안고 밀라노역 구석자리를 차지해 앉아 있었습니다.
밀라노 역 구내에는 사람들이 담배꽁초며 쓰레기를 아무곳에나 마구 버려대니
어찌나 지저분한지,
밀라노가 패션의 유행을 이끌어가는 세계적인 도시에다
이탈리아 최고 부자도시인지는 몰라도
무지하게 더러운 역을 갖고 있는 도시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무슨이야긴지 제제 거리며 놀고
저는 묵직한 남편가방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멀건히
벽에 걸린 두명의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늑대 부조품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가 서툰 한굴말로 인사를 하는것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인도나 파키스탄 아니면 방글라데시인듯한 검은 콧수염에 키가 크고 피부가 구릿빛인 남자였습니다.
"예에, 안녕하세요?"
"한국에 1년 있어요. 한국에서 일했어요."
선해뵈는 얼굴에 웃으면서 말하는 그를 보며 하필이면 왜 그때 나는
'한국의 나쁜사장에게 학대받은 외국인 노동자'가 떠오르는지요.
'혹시 한국에서 당한걸 죄도 없는 나와 우리 애들에게 갚으려는거?'
먹을거 구하러간 남편은 어디만큼 헤매고 있는지 돌아오지도 않고.. ...
내가 메고 있는 중요베낭,요걸 내놓으라 하면 어쩌지?
'에이 나쁜 한국사람' 이라며 퍽퍽 치고 달아나면 어쩌지?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라
그 한국말을 써보고 싶어 하는 남자에게
저는 경계심을 부쩍 내보였지만
그 남자는 여전히 말을 걸어보고 싶어 했습니다.
"한국 이뻐요."
"예?"
"여기 안이뻐요. 한국 이뻐요."
그는 벤취밑에 이리저리 뒹구는 콜라켄이며 과자봉지,과자부스러기
온갖 쓰레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여기 안이뻐요. 한국 이뻐요."라고 말하는것이었습니다.
저는 맞는 말이라고 웃으며 대답을 하고는
자꾸만 우리주위를 서성이는 그에게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듯 우리들끼리 다른 얘기를 했습니다.
한참후에 그남자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또 한참후에 남편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통닭구와 햄버거, 마실것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남편에게 그 '외국인 노동자'얘기를 하니
'경계심을 가진건 잘한일'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만
사실, 지금도 저는 그일을 생각하면 찜찜한 기분이 듭니다.
1년동안 일했던나라, 한국사람을 만나 반가와 하는 외국인에게
혹시 치한은 아닐까 쓸데없이 의심하는바람에
착한 한사람의 마음을 씁쓸하게 한건 아닐까 해서입니다.
그런일은 또 있었습니다.
물류즈에서 니스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데
웬 젊은 남녀 백인커플이 오더니 지폐 한장을 보여 주며
동전으로 바꿔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동판매기에서 뭘 사려하는데 동전이 없다고요.
하필이면 그때 또 남편이 없는데....
'지갑을 꺼내면 이것들이 확 채가는걸 아닐까?
혹시 가짜 돈은 아닐까?'
이런걱정으로 동전이 없다고 말하는데 남편이 오더군요.
남편은
"얘네들 착하게 생겼네. 목마른가본데. 바꿔줘."
라고 하니 그제야 안심이 되어서
중요베낭을 열어 지갑을 꺼내고 돈을 바꿔 주어도
정말 아무일도 안일어 나더군요...ㅎㅎㅎ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스페이츠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기차가 달릴수록 산세가 험해지며
북쪽으로 북쪽으로 산악지대로 올라간다는게 느껴졌습니다.
스페이츠에서 인터라켄,알프스산 관광지 마을, 인터라켄으로 가는
동화속 그림같은 빨간 스위스 기차를 탔습니다.
절벽위를 달리고
나무숲속을 달리고
파란 호숫가를 달리고
계곡을 지나쳐 달리고
나무로 지은 농가를 지나고
잘 다듬어진 목초지를 지나고
경사지를 오르락 내리락
흔들흔들
빨간 기차는 그렇게 우리 가족을 스위스로 모셔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