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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눕는다


BY 동해바다 2004-06-24

   

     양떼들이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듯한 선명한 구름이 하늘 가득이다.

     올해의 첫 태풍 "디앤무"는 도랑의 물이 넘치도록 300mm나 되는 장대비를 쏟아 
     부었다. 안타까움이 반가움으로 변했던 단비가 순식간에 다시 불안함으로 변하고 
     말았다. 루사와 매미를 겪은 영동주민들 모두가 한마음이였으리라.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보며 이틀후의 산행에 아무 지장이 없을까 했는데 기우였나
     보다. 큰 피해없이 무사히 지나간 태풍이 그리고픈 충동을 일게하는 하늘을 만들어
     놓고 떠나갔다. 
   
     제대로 된 산행을 근 1년만에 오르려니 소풍을 기다리는 초등학생마냥 가슴이 
     설레어 무사히 산에 오를수 있을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하룻밤을 지새웠다. 
     
     정선과 영월 그리고 태백시에 걸쳐 아름답게 빚어놓은 1,573미터의 함백산,
     백두대간의 한허리를 오르게 된 여성산악회의 두번째 산행이다. 
     유월의 숲보다 더 아름다운 숲이 있으랴...
     계절마다 산속의 수목들은 색을 달리하며 옷을 갈아입는다. 이름을 알수 없는
     야생화들는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며 봄부터 질서정연하게 피고 또 진다.
     소멸과 생성이 번복되는 자연, 그리고 이에 일치하는 인간의 윤회설을 떠오르게
     하는 산, 이 모든 것들은 무지의 나를 깨우치게 하는 배움의 산실이다.
     회색빛 옷들을 벗어던지며 연출했던 연초록의 잎이 부지런히 짙은 색으로
     변모를 하는 유월이다.
  
     내 삶의 나이테는 여름을 지나고 있지만 짙어가는 유월의 초여름 숲속에 
     나이테를 꿰어 맞추는 연습을 하면서 숲속을 걸었다..
     삶에 충실하며 짙어가는 신록처럼 끈끈한 가정애愛를 만들고자 노력한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눅진한 흙내음과 비릿한 낙엽썩는 냄새는 상큼한 수목들과
     어우러져 숲을 채우고 있다. 삶의 부조화를 조화롭게 이루어가야 할 내 몫을
     그 내음으로부터 배운다. 야생화 이름들을 하나하나 익히는 것처럼 배울수 있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원숙한 미를 보여줄수 있는 자신감 있는 모습 으로 
     풍성하고 화려한 가을을 맞고 싶다. 그렇게 나이테를 보태고 싶은 것이다.
    
     유월의 숲에 기대어 더 깊숙히 들어가 본다. 
     아직 빗물을 품안고 있던 숲과 색 짙어가는 수목들, 여름으로 치닫는 그 속에서 
     수많은 상념들이 호흡을 고르면서 발길을 이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시위를 하고 몸이 날아갈 듯한 강풍에 계절 
     초여름은 숨어버리고 만다. 산속에 여름은 없었다. 
     살아있는 생명의 소리가 내 귀를 청정하게 만들고 숲속의 여백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로 인해 반짝거리는 잎새 위의 물방울은 몸과 부딪치면서 또르르르 떨어지며 
     나를 적신다. 선선함이 가을을 만난듯 하다.
     제몸을 희생해 스폰지처럼 녹녹하게 만들어 놓은 낙엽길은 삶의 때와 오욕(五欲)을 
     씻겨준다.
  
     힘들때 반갑게 나타나는 키 작은 풀들의 대환영식...
     한쪽으로 누워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거센 바람에 내몸 또한 기울어 풀과 한몸이 
     되려 한다.
     문득 어느 시인의  내용은 떠오르진 않지만 시의 제목이 생각났다.
  
     - 풀이 눕는다 -

     시인들은 평범한 자연 현상 속에서 삶과 연결지어 의미 있는 비유를 한다. 
     바람에 가누지 못하고 힘없이 한쪽으로 기우는 풀잎의 모습에서 힘없는 민중들을
     떠올리며 쓴 듯한 기억이 어슴푸레히 난다..
     함백산의 누워있는 풀들을 보면서 약하디 약한 내 나라의 면모를 보는것 같아
     가슴 저린다.
     
     살고싶다고 절규하는 젊은 청년의 모습에서 난 울음을 안으로 안으로 삼킨다.
     한 젊은이를 지키지 못한 힘없는 나라 한국...
     통한을 금치못하는 어제 하루를 생각하면서 누워있는 풀을 내나라에 대비시켜 본다. 
    
        

     구릉지대와 키 큰 장병들이 사열하듯 서있는 낙엽송들이 또 다른 파노라마를 펼친다.
     까치수염이 군락을 이뤄 흰수염 잔치를 벌이고 보라색의 꿀풀과  엉겅퀴, 뒤늦게 핀 
     찔레꽃, 머리가 나빠서인지 꽃과 꽃이름을 머릿속에 입력시켜도 곧 잊어버리는 
     수많은 야생화들이 그득한 능선의 아름다움에 빠져 어느사이 정상에 다다랐다.
     
     해발 1,573미터 함백산.
     선두에서 이끌고 후미에서 밀어주는 단합심으로 27명 회원 모두가 무사히 오른 
     정상에서의 휴식, 점심을 하기에는 장소와 시간 날씨가 협조되질 않아 기념사진을 
     몇 장 찍고는 곧바로 하신길로 접어 들었다.
     널찍한 장소를 발견해 먹거리들을 펼치며 구수한 입담과 함께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주변에 피어있는 미백색의 초롱꽃들도 배고픈 듯 입을 벌리고 있다. 
     배고파 힘이 없어 고개숙인 것일까? 
     갑자기 방울모양의 꽃에서 소리가 나면 어떨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초롱꽃, 은방울꽃, 금강초롱 등에서 도레미송이 나오고 시원한 바람도 한몫하며
     배경음악을 깔아준다. 새소리 물소리 등이 들어가면 금상첨화, 그래서 멋진 연주곡이 
     하나 탄생한다. 
     재미있는 혼자만의 생각타래를 풀며 입가에 웃음짓는다.
     식사를 하며 펼쳐보는 여유있는 시간이다.
  
     점심을 먹고 내려가니 말끔히 포장되어 있는 도로가 눈에 띈다.
     정선과 영월을 잇는 지방도로, 거의 정상까지 차가 다닐수 있도록 닦여 있기에 
     가족 드라이브코스로도 적당할 듯 싶었다. 쉬이 차로 올수 있는 산을 힘들게 땀 
     흘리며 오르는 사람들, 자기자신과의 싸움이며 또하나 삶의 도전이며 희열이다.  
     만항재..
     정선군 고한읍과 영월군 상동읍 그리고 태백시 등 세고장이 한데 만나는 지점에
     휴게소가 있었다.
     그곳에서 휴식을 취한후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철망이 있는 군사시설을 통과하려다 통제가 있어 왔다갔다 하는 혼란스러움이 
     있었다. 짜증보다는 나물을 뜯으면서 희귀한 나비의 모습과 지천인 개망초꽃을 
     바라보며 웃고 떠드는 회원들의 넉넉한 마음을 보았다. 우거진 숲을 젖히고 오르
     내림을 반복하는 등산길에서 헉헉대는 내 스스로를 칭찬해 본다. 
     '그래 잘 왔어, 아주 잘 온거야 넌 이곳에서 하나의 삶을 체험하며 가는거야'
   
     흙길에 박아놓은 빨간 리본따라 내려가는 산길 옆에는 산딸기가 밭을 이루고 있었다.
     뱀이 나온다는 지휘자의 말은 빨간딸기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였다. 너도나도 들어가
     햇살받으며 잘 익은 딸기하나를 입에 물어본다. 달콤 새콤한 그 맛에 손이 바삐 
     움직이고 빨리 오라고 소리쳐 대는 목소리는 점점 커져만 간다.
  
     낙엽송 사이로 마을이 보이고 하산길 종지부를 찍는다.
     줄지어 서있던 나무들도 우리들에게 한차례 부는 바람으로 배웅을 한다.
     누적되어 있었던 삶의 피로를 한차례 벗어던졌다. 
     
     이렇듯 산행은 삶의 재충전이다.
     천오백 고지의 산을 오르면서 머릿속에 담아 온 알멩이들을 하나하나 꺼내보는
     이 작업은  마음을 다스릴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며 내 자신을 위한 투자이다. 
     재충전의 삶을 준비하며 백두대간의 한구간을 다녀왔다는 뿌듯함과 짧으면서도 
     긴 여운을 남기며 누워있는 함백산의 풀을 생각한다.
  
     유월의 풀이 눕는다..
  
  
     ▶◀ 故 김선일 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