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시종일관 진지한 손 매무새로 가로, 세로, 폭의 깊이까지도 한 치의 오차 범위도 두지 않을 태세로 헐거운 줄자의 느슨함을 팽팽하게 잡아 당겨 재고 또 잰다.
발빠르게 입력된 도면도는 쪼잔한 두뇌에서 튕겨져 나와 A4용지에 일렬 종대로 널부러진 숫자를 지휘한다.
"아무래도 작은 것 같지 않아?"
30분 가량 분수의 세밀함과 소수점의 고지식함을 통해 얻어낸 확신의 물음이다. 보기좋은 뚱함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내뱉는 답변이 고울리 없다.
"그럼, 관두든지..."
첨부터 목아프게 원하던바도 아니었고, 괜시리 숲속 처마 밑에서 엿가락처럼 휘어져 지내온 사람에게 툭하니 던져주며 바람 넣은게 누군데.
며칠전 회사에서 직원에 한해서만 대폭할인된 가격으로 냉장고와 세탁기를 기한내 신청 받는다며 프린터해서 가지고 왔었다.
"보고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해"
순간, 기억 상실로 인해 머리가 잠시 둔해진 남자에게 아이가 가지고 놀던 도깨비 방망이를 나이 만큼 때리고 싶은 걸 참아냈다. 필경 뭘 잘못 먹었거나, 내일이면 세탁되어질 검은 돈을 꽁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좁쌀영감의 이미지 차원에선 고객 서비스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애국가 가사에도 버젓이 올라와 있는 마르고 닳도록 쓰자는게 생활 신조이니까.
덜컥,남자가 마취에서 깨어나기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낚아 챈 한마디!
"냉장고!"
순간,눈가에 얇게 경련이 이는 것을 목격했지만, 어쩌랴 먼저 말 꺼냈으니 ... 속으론 가장 싼 세탁기를 택하길 원했겠지만, 그토록 광고에서 해대던 "여자라서 행복해요" 카피를 죽자고 나도 해보고 싶었음을 ..
"그..그래, 함 알아보지 뭐..."
남자는 A4용지가 마르고 닳도록 백단위가 넘어가는 가격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무..물,물좀 줘"
폼새를 보아하니 직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신청을 해대니 목구멍에 떨어지는 침의 따끔함을 참아내며 턱하니 신청란에 대기 상태로 약속 다짐 받고 온 듯 싶었다. 설마 이 여자가 그런다고 눈 돌아가는 가격에 '옳다구나 사 주시오' 하지 않을거란 확신에 그냥 아주 쬐그마한 돌맹이를 손 벌벌 떨림을 참아내며' 함 던져나 보지'하는 맘 이었을 것이다.
서당개도 3년만에 짠~해서 다 알아 차리는 데,하물며 12년차가 로또보다 더 어려운 이 기회를 순순히 물리겠는가. 어림 반 푼에 양푼어치도 없지. 내 평생 우아하게 양팔로 어디 냉장고를 열어 보겠는가. 더더구나 이제는 정년 퇴직을 부르짓는 저 나약하고 빈약한 지금의 냉장고의 항변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이리저리 부시럭 거리기를 여러번. 출근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꾀제제한 목소리에 기름칠을 휘리릭 뿌린 사람 처럼 의기양양 냄새 풍기는 말투로
"거 뭐냐, 냉장고가 현관문에 못 들어 올 것 같지 않아?. 다들 그러네,오래된 아파트는 좀 들어가기 그렇다고... 이 따 함 재보고 아니면 없던 일로 접지 뭐"
가물가물 꼴까닥 해가 넘어 가기 전에 퀵 서비스맨 보다 눈썹 빠지게 후다닥 들어서더니 서랍장 귀퉁이에 턱하니 배 두드리고 트림하고 있는 줄자를 사정없이 일으켜 세우더니 장엄한 눈초리로 임무 수행의 결과에 生死의 협박을 가하곤 매몰차게 줄자의 몸뚱아리를 좍!좍! 찢어댔다.
서서히 들어내놓고 퍼져 나오는 음흉한 미소. 저 아래 창자에서 울려퍼지는 '음하하하' 행복한 비명에 어쩔 줄 몰라하며 거봐라는 증거물을 대보이며 전투에서 패한 내 꼬랑지가 내려지길 기대하는 눈치다.
"거 참, 간만에 좋은 일 한 번 할려고 했더니, 집이 안 따라주네... 이 담에 큰 집으로 이사가면 그 땐 제일 빵빵한 걸로 내가 주문하지"
속에선 지글지글 찌개가 끓고 끓어서 시원한 냉수 한 사발 들이마시고 싶은 심정이었지만,뚱한 답변으로 향변을 끝냈다. 말해봐야 입만 아프고 애초에 기대치에 눈꼽치도 달지 말았어야함을 잠시나마 눈 돌아가는 냉장고 그림에 이 남자의 원조 쪼잔을 잊었던게다.
그래도 직격탄을 맞은 손길은 설거지 수돗물이 사방천지로 튀어 올라 연어처럼 팔딱거려도
'에이!우라질. 꼬부랑 할머니가 되면 어디 힘들어서 양쪽문을 열겠는가?'
덜그덕 덜그덕 그릇이 깨져라 두들겨 패고 문지르는데,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
"엄마! 물 좀 아껴써. 다 튀잖아."
딸아이 철딱서니에 천년 묵은 구미호 보다 더 날렵하고 더 강하게 쬐려보자 눈 튀어 나올만큼 놀라더니 지 딴엔 되게 걸리겠다 싶은지 공부한다며 얼른 몸을 숨겼다.
남자는 저녁 먹은 배가 아직 아랫도리에 인접하지도 않았는데, 까닥까닥 리모컨 놀이에 지쳤는지 슬금슬금 며칠간 눈치밥에 불어터질 입이 안쓰러운지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듯
"어이! 간만에 통닭이나 시켜 먹을까? 양념이랑 반반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