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이 버스기사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320

참 부자


BY 선물 2004-02-24

이가 시큰거려서 며칠동안 치과를 다녀야 했다. 오른쪽 위의 어금니가 심하게 탈이 난 것이다. 신경치료를 받은 뒤 씌워야 될 것 같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은 이래저래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치료 때 느끼게 될 통증에 대한 두려움도 컸지만 그보다는 한 구석 자리잡은 소요경비에 대한 걱정이 내 마음을 더 무겁게 했던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삼십만원도 채 못되는 금액이 그다지 큰돈도 아니건만 그래도 그렇게 돈을 쓴다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았기에 참고 견딜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병원에 가지 않고 통증을 가라앉히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번 통증은 아무래도 쉽사리 가라앉을 성질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다행히도 치료가 끝난 뒤 의사선생님은 당분간은 이를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며 굳이 씌우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뜻밖에 돈을 아끼게 된 나는 기쁜 마음이 되어 병원을 나서는 발걸음이 어찌나 가벼웠던지 아마도 뒤에서 지켜보던 간호사들의 눈에조차 나의 그런 속내가 진동하듯 그대로 감지되었을 것이다.
 
어릴 때, 부모님 그늘 아래서는 돈에 대한 걱정을 달리 해 본 적이 없었다. 설사 부모님은 많이 힘들어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어린 아이였던 나는 그런 것을 눈치 챌 만큼 철들지를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머리 속이 돈에 대한 걱정으로 지끈거릴 때가 참 많게 느껴진다. 이렇게 이십 몇 만원을 아끼는 것만으로도 발걸음이 날아갈 정도의 행복을 느끼게 될 만큼 팍팍한 인생살이가 된 것이다.
 
사실 돈을 걱정하며 살게 되리라는 생각은 별로 해 본 적이 없었다. 결혼 전, 형님 되실 분들이 다니는 강남의 유명미용실에서 머리 손질을 하고 나오며 남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고급 미용실에 다니려면 정말 돈이 무지 많아야 되겠어요."
그 때 남편은 평생 그렇게 살게 해 줄 것이라는 말을 해 주었다. 그 당시는 남편이 안정된 직장에서 유능한 사원으로 인정받고 있을 때라 내가 원하기만 하면 충분히 그렇게 생활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주는 남편의 마음이 고맙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모든 것은 생각대로 풀려나가질 않았다. 남편은 탄탄했던 회사를 퇴직해서 자신의 일을 갖고 싶어했고 나는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그 배경에는 어쩌면 나도 월급쟁이 아내라는 뻔한 생활에서 벗어나 제법 경제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란 욕심이 한 몫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수수방관했던 대가를 톡톡히 치러 내야만 했다. 잘 사는 사람은 사람이 돈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돈이 사람을 따른다고 한다. 꼭 그 말이 맞는다고 생각진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성실히 살아가기만 한다면 그만큼의 결실은 분명히 거둘 수 있으리라는 희망 또한 세상을 겪을수록 조금씩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생각처럼 세상이 진실되지도, 또 호락호락하지도 않다는 것만을 씁쓰레한 마음으로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끔 몸과 마음이 고단해 보이는 남편을 보면서도 정작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는 안타까움이 들면 스스로의 무능력에 비참해지기도 한다. 주변을 보면 재테크에 통달한 주부들도 참 많던데 그런 쪽으로는 도대체 눈곱만큼의 재주도 없으니 나라는 사람이 맹꽁이처럼 여겨져 한심스럽기만 한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나름대로 변명할 여지는 분명히 있는 듯하다. 요즘은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말이 유행일 만큼 젊은이들의 취업이 힘들다고는 하지만 내가 학교를 졸업할 당시만 해도 88올림픽의 효과도 있고 해서 생각보다는 쉽게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도 학원을 다니며 자격증이라도 하나 더 취득하고자 노력하던 어느 날 무심코 보게 된 일간지의 구인란에서 내가 전공한 학과를 모집요강으로 하는 짤막한 광고가 눈에 띈 것이다. 찾아간 회사는 'OO투자 정보 연구소'라는 이름을 내걸고 주식투자에 대한 여러 정보를 모아 정보지도 발간하고 투자상담도 해 주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뜻 밖에도 단번에 합격통보를 받은 나는 전공도 살리고 재테크도 배울 수 있겠다는 욕심으로 깊이 생각지도 않은 채 그 곳에 취직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내게 주어진 일은 경제신문을 읽고 주가(株價)동향에 영향을 주는 기사들만 발췌, 요약하여 정보지에 싣는 일이었다. 하지만, 경제기사보다도 신문에 실린 연재소설 읽기에 더 열을 올리던 내게 그 일은 애시당초 적성에 맞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투자자들과의 직접 상담도 해야 했던 나는 돈에 대해 절박한 심정인 사람들과의 만남 들이 너무나 피곤했고 때로는 두렵게까지 느껴졌다.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겠지만 주식 투자를 하는 돈은 여유자금이어야 하고 투기성 단기 투자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어야 비교적 낭패를 보지 않고 성공하기가 쉽다. 그러나 내가 만난 투자자들은 한결같이 남편 몰래 돈을 운용하는 주부들이거나 자신의 노후를 보장해 줄 퇴직금을 위험은 생각지 않은 채 어떻게든 크게 불려 볼 생각으로 투자하는 노인 분들, 그리고 결코 투자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게 욕심부리는 마음 급한 투기성 투자자들이 대부분이었으니 그런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일은 그야말로 피 말리는 듯한 초조와 긴장감을 인내해야 하는 것이었다. 비교적 겁이 많던 내게 그 일은 참으로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고 결국은 일 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미련 없이 사표를 쓰게 되었다. 또한, 내가 재테크에 관한 노하우를 많이 배워서 누구에게 시집가더라도 환영받을 것이라던 연구소 소장님의 덕담과는 달리 나는 이재(理財)에 관해서는 눈과 귀를 막고 싶다는 생각뿐인 어수룩한 바보가 되고 만 것이다. 

그래도 돈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편이라 적은 돈 때문에 마음 울적한 일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내게도 불안한 마음이 자꾸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마음을 비워내려 하여도 자식에 대해서는 꾸역꾸역 올라오는 그 야릇한 욕심들을 거두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기본적인 것 외에는 별로 해 주는 것이 없는지라 안쓰러운 마음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남편은 늘 성실하게 노력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 왔고 나 또한 내 몫에 관한 것은 아낄 수 있는 여지라는 범주(範疇)의 최상위에 올려놓았으니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 하고 있다고 자부하며 스스로 위로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상대적 빈곤감으로 초라해지기도 한다. 다들 어디서 그렇게 많은 돈이 나오는지 흥청망청 잘도 지출한다. 정말 굶주림을 참아가며 살림을 일궈내신 시부모님 덕분에 지금 사는 겉 모양새는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경상 수입(經常收入)은 그에 비해 턱없이 미약하여 오히려 더 쪼들리는 생활을 하게 되고 만다.

그렇지만 어쩌다가 갖게 되는 그런 초라함보다는 조금 부족한 듯 한 살림살이에서 느껴지는 크고 작은 행복들이 훨씬 잦은 빈도로 다가오니 그리 서글프지만은 않다.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어떻게 생각해보면 얼토당토않은 이득을 꾀하지 않으니 배짱 편하다 생각되고 작은 돈을 쓰면서도 충분한 행복지수를 느끼게 되니 그 마음이 부자라 생각된다. 천 원 짜리 사과 한 알을 깜짝 세일에서 반값으로 사게 되는 그런 사소한 행운에서조차 신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니 나는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다. 많이 가진 자가 부자가 아니라 덜 갈구하는 자가 부자라는 말은 그래서 수십 번을 곱씹어 보아도 기막히게 훌륭한 말이고 나를 충분히 위로해 주는 말이다.

알고 지내는 한 이웃은 매년 연말이면 불우이웃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을 쾌척(快擲)한다. 알고 보니 그 분의 친구 분이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가진 것은 넘치게 가진 것이라며 더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고 이 이웃에게 맡긴 것이라고 한다. 평소 봉사를 많이 하는 이웃에게 그 일을 부탁 한 것이다. 나 또한 욕심부리지 않으며 살려고 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늘 부족함을 느꼈던지라 객관적으로는 우리보다 더 못한 그 분들의 맑은 생각이 새삼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만일 내게 남은 욕심이 있다면 정을 쪼듯 깨끗이 없애고 싶다. 대신 욕심을 비운 그 자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싶다. 그리하여 수천, 수억은 되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가엾은 사람이 아닌, 비록 재테크엔 무지할지라도 돈 때문에 얼굴 찌푸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 이십 몇 만원. 아니, 달랑 사과 값 오백 원에도 무진장 행복해 할 수 있는 참 부자가 되어 평생 평화라는 아름다운 보석을 지니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