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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엄마,엄마와 나.(1)


BY 개망초꽃 2004-02-16

'고향 산 한쪽엔 몹쓸 병에 걸린 아버지가 묻혀있습니다.
고향 산 언저리엔 돈 벌러 떠난 엄마의 뒷모습이 자리잡은지 오래입니다.
고향 들판엔 패랭이꽃이 개망초꽃이 강아지풀이 우리엄마 고단함처럼
나의 서글픔처럼 지천입니다.
고향 신작로에는 국민학교를 오가던 미루나무가
주름치마 펄럭이던 나의 길을 열어주곤 했습니다.
온통 고향 생각에 가슴 절절합니다.
강원도 산골...
아름다운 기억보다는 아픈 기억이 많지만 그래도 난 그때가 그립습니다. 뭘 몰랐던 그때가...'

나의 엄마는 스물여덟에 혼자서 되어서 육십넷인 지금까지 혼자 사신다.
초년과부는 혼자 살아도 중년과부는 혼자 못산다는 옛말이 있듯이
나의 엄마는 초년과부라서 혼자 잘 살아왔는지 그건 모르지만
지금도 엄마는 옆구리가 시려도 혼자가 좋고 밤에 잠이 안와도 혼자가 홀가분하시다고
혼자살고 있는 나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지 뭔지......

육체도 정신도 한창 무르익는 사춘기였던 딸아이와
운동화를 갈아 신으면서 실내화 한 짝은 신발주머니에 넣고
한 짝은 현관에 두고 오는 철부지 아들 아이와
왜 우리 가정이 없어지고 어째서 잔소리 꾼인 할머니네로 이사를 오게 됐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 나이로 따지면 나의 엄마와 맞먹어도 되는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이년전 가을날에 엄마네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더 거슬러 올라간 10년전, 친정 엄마가 일산인 지금의 이곳에 아파트 분양을 받았고
나도 덩달아 엄마 옆에 살고 싶어 그 다음해에 엄마네에서 대여섯정거장 떨어진
일산 신도시에 처음으로 주인 눈치 안보고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되는 내 터를 마련했었다.
땅냄새 맡고 나뭇잎 만질 수 있는 높이의 층이 되길 바랬으나
하늘 가운데 더덩실 떠 있는 11층에 짐을 풀어 놓고
앞 베란다에서 어지럼증 없이 빨래를 널게 되기까지는 몇 달의 시간이 필요했었다.
부엌 식탁에 앉아 거실 창을 바라보면 온통 하늘, 하늘, 하늘색이었다.
그때 그 시절은 그래도 행복했었다.
아이들이 잘 커갔고 아이들 아빠도 잘 살아보려는 노력이 보일때이기도 했다.

그러나 난 혼자가 되었다.
딸아이는 능력이 없으면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죠 하면서 아빠에게 반항을 했고
아들아이는 개를 끌어 안고 한쪽 구석에 앉아 울기를 여러번
하지만 이미 결정지어진 사건들이었고,
어차피 헤어져야할 시간 앞에선 어느 누구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창 환한 앞 베란다에 사시사철 꽃을 피우던 사랑초 화분 네 개를 챙겼고
딸아이는 책상위에 있던 컴모니터와 컴의 연결선들을 하나하나 묶었고
아들 아이는 자기가 제일 사랑한다는 개의 살림살이를 종이박스속에 말없이 넣었다.

나의 엄마는 여리고 여려 눈물이 많고
취미가 청소,꽃키우기,자식들 밥 먹이기기이신 우리들의 어머니와 하나도 다를게 없는
모성애가 강하신 대한의 강력한 어머니시다.
엄마는 내가 혼자가 될즈음,
타의든 본인이 결정을 하셨든 나와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걱정하지 말고 같이 살자."
"속썩고 사느니 잘한거야.
나도 너와 니 동생들 혼자 키웠는데,너는 내가 있는데...넌 나보다 낫다." 는 위로의 말에
두 눈안에 꽁꽁 묶어 두었던 울음 주머니는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우는 나를 두고 엄마는 실컷 울어라 하셨다.
"그래 실컷 울어라.그러나 같이 살면서는 울지 말아라."

남편은 가족을 부엌에서 쓰던 너칠너칠해진 스폰지가 된뒤에야 마지막 선처라며 호적 정리를 해주었다.
그 상태에서 무미건조하게 없는가슴으로 짐 정리를 했다.
엄마네 살림과 중복되는 것은 다 버렸다.
대부분 다 버려야했다.시집올 때 엄마와 같이 고른 떡살무늬가 떡떡 찍힌 장롱도 버렸고,
부드러운 음악이 솔솔 나오는 낡은 오디오도 버렸고,
두 개의 책상도 하나로 줄였고,
옷장의 옷들도 웬만한 건 아낌없이 재활용 박스속으로 들어갔다.
십년이상 끌고 다녔던 책도 작은 소품들도 손끝이 쓰려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엄마가 짐정리를 도와 주신다 했지만 나는 혼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 보면 잠이 더 안올거다.니가 쉬엄쉬엄 정리해라."
아이들은 학교 끝나면 엄마네로 보내라 했지만 나는 그냥 놔 두라고 했다.
"며칠 있으면 좁은 집에서 같이 살건데,넓은 집에서 하루라도 더 있는게 좋겠지."
엄마와 나는, 나와 엄마는 결혼생활이 여기까지라면 다 받아 들일 준비를 오래전부터 갖추고 있었다.

가을이었다.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 입구에 살구나뭇잎이 노리끼리하게 물들 때,
엄마네 아파트 뜰엔 자주 국화가 한창일 때,
우리 세식구는 개 한 마리와 함께 엄마네 집에다 고단하고 가난한 여정을 풀었다.
언제나 깜짝 놀란만큼 깔끔하시고
베란다엔 엄마를 닮아 부지런한 꽃들이 사계절 내내 피어나고
어디를 가시든 우리집에 오셔서도 한시간 이상은 앉아 있지 못하시는
집이 좋다며 집으로 돌아가시던
어찌보면 예민하시고 어찌보면 정확하시고 어찌보면 단정하시고 어찌보면 답답하신 나의 엄마.
이런 엄마와 난 다시 한집에 살게 되었다.
16년전에 24년동안 한상에서 밥을 먹고 한 이불속에서 잤던 엄마와
먹기싫은 아침밥을 먹어야 하고 제시간에 잠을 자야한다.
엄마품을 벗어나 멀리 날아보겠다며 날아갔던 딸이 두 날개를 접고 엄마품으로 안기게 되었다.
그 때는 하나였는데 내 양쪽 옆구리를 끼고 있는 두 아이가
늙기도 바쁜 엄마에게 또 하나의 부담을 주게 되었다.
16년동안 길고 긴 여행에서 돌아온 그날 밤엔
엄마도 나도 두 아이들도 한마리의 개도 꿈을 잃고 밤새도록 헤매이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