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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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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진 안목의 울타리 그 후


BY 잔다르크 2004-01-25

우리 아들 둘과 친구 아들 하나,
도합 셋이 이월과 삼월에 연이어 군에 입대한다는 이유도 이유려니와
재수해서 원하던 대학에 척 붙은 친구의 둘째 축하 턱까지 겸해
동창생 다섯과 딸린 아이들이 함께 한정식 집 방 칸을 차지하고 앉았다.

어른은 어른들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소곤소곤, 왁자지껄, 와하하하.
유혹도 많고 터지고 무너져 내릴 지뢰밭도 많은 세상,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할 때까지,
아니면 더 먼 훗날 우리들이 늙어서 자식한테 받을 대접까지,
서로서로 지켜 봐 주는 선한 감시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호가 넘게 모여 살았던 어릴 적 고향 마을엔 우물이 다섯 개 있었다.
그 중에서 우리 집 삽작 바로 앞에 있었던 샘은 심한 가뭄에도 바닥을 쉬 들어내지 않아
똬리에 옹자배기를 인 아낙들과 엉덩이를 살랑거리던 처자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았던 우물이었다.

딱히 아랫마을 윗마을을 싸돌아다니지 않아도
할머니가 명주장사를 해서 깔았다는 안채 마루나 사랑채 쪽마루에 앉아
할 일 없이 다리만 흔들고 있으면
온 동네 소식을 손바닥 보듯 귀동냥 할 수 있었다.

논밭전지 하나 없던 붙들네집 타디 아낙이 밤새 야반도주를 했다는 둥,
건너 마을 고자 아저씨가 밤새 피울음을 토하며 섧게 울더라는 둥,
윗마을 저수지 가장자리에 밤사이 손바닥만한 핏덩이가 버려져 있더라는 둥,
도회지로 나간 가재이댁 아들이 돈을 아예 갈퀴로 끌어 모으고 있다는 등등.

그 중에서도 내 귀를 쫑긋하게 하는 아낙들의 수다는
어느 집 아들은 인사성이 바르다거나, 누구 집 자식은 버르장머리 없다거나,
윗마을 무슨 댁 아이들은 위아래도 모르고 지 부모 알기를 개떡같이 안다는 등의
또래 아이들 이야기로 거품을 물 적이다.

“골목에서 마주쳐도 빠이 치다만 보는 아가 쌨다.
너들은 동네어른을 만나거든 그라지 말그래이.
커만 아무 짝에도 몬 씬다.”
할머니가 살아생전에 늘 입에 달고 사신 말이다.

철없던 시기엔 자칫 한 걸음만 헛디디면 어긋난 길로 갈 뻔한 일이 좀 많았으랴마는
싫던 좋던 내 얼굴만 보면 당장 어느 집 자손이라는 것을 아는 터라
자연 행동거지를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서로서로 감시자가 되어 있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

짧은 기간에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대도시란 개념이 보편화 되고
이목이나 보는 눈 때문에 마구잡이로 살 수 없었던
안목의 울타리가 일시에 허물어진 후부터는
자연 못 볼 일을 많이 보고 듣고 살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 사람 좀 살려 주이소! 이 놈이... 아이고, 아야.”
고래고래 질러대는 고함 소리에 놀라 화닥닥 뛰쳐나가 보면
할머니의 울부짖음은 아랑곳없이
아들이 아버지를 마구 때리고 있다.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할아버지, 파출소로 연락할게요.”
한손으로 피범벅이 된 머리를 감싸고
나머지 손으론 연신 그러지 말라며 손사래를 치신다.

이웃의 눈도 아랑곳 하지 않고 수시로 판을 벌리는 장성한 그 집 아들이 괘씸해
하루는 물어 보지도 않고 몰래 동네 파출소에 전화를 넣었다.
“여기 몇 동 몇 혼대요, 아들이 지 부모님을 패고 있거든요. 빨리 와 주이소.”
한참 뒤 두런두런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조용해졌다.

그 후로는 큰 소리도 한결 덜 나고
더러 마주치기라도 하면 고개를 푹 숙이고 애써 외면하며 지나친다.
이젠 대단지 공동체의 힘 있는 감시자가 아니라
기껏 신고나 해대는 나약한 이웃일 뿐이다.

요즘은 이유도 없이 터지고, 털리고, 붙잡혀 감을 당하는 시대니
내 아이만 잘 자라주면 다른 아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는 세상이 아니다.
어디든 소속된 일원이라는 시선을 몸으로 느끼며 성장한다는 건
우리가 보호해야 할 이 땅의 아들딸들에겐 중요한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을 먼저 보낸 후 남은 수다를 마저 떨고 집에 들어서자
밤이슬을 맞으며 아르바이트를 다니는 둘째가 
막내와 주섬주섬 저녁상을 차리다 말고
“여태 가든 이모야가 우리한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꼭 성공으로 보답하자.”

'연출 한답시고
일부러 짜고 친 고스톱은 아니었지만
바싹 마른 스펀지에 물 빨려 들어가듯
그단새 야들 몸속으로 스멀스멀 스며든 건더기가 있었던가?"

하기야 이리저리 아무리 재 봐도 한참은 모자라는데다
낯가림이 심해 유달리 사람을 가리는 나를
작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끼워 준 그네들의 후덕함에
이 순간만은 그저 머리라도 조알이야 마땅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