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국민학교 시절... 너무도 볼품없어, 지나가던 아이들이 수군거리던 그 집.
'인테리어'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사치스럽게 느껴지던 그 집.
흔히, 집의 구조를 설명하는...거실,주방,복도,작은 방,큰 방의 개념조차 없던...그저 방들로만 쭉 이어진 그 집.
지어진 지 몇 년인지 가늠 할 수 없어 그저 '팔순'을 훨씬 넘기신 내 할아버지의 연세에서 대충 젊은 날을 빼는 계산법으로 추측하는 그 집.....
가진 것 없는 집안에서 따질 꺼라곤 '아들'하나였던 칠남매의 맏이인 내 아버지는, 지금에 와서야 회상하는 엄마조차 지긋지긋하게 순했다...고 말문을 뗄 정도로 남의 일이라면 열일을 제치고 나서서 돕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셨던 것 같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에서 금은방으로 전업을 한 후 그 성격 덕에 당시 교회집사셨던 절친한 친구의 보증을 잘못 서서 온 가족이 거리로 나앉는 상황을 만드신 후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결국은 딸밖에 없다...는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때문에 제 몸 누일 묫자리 하나 못얻고 32세 젊은 나이의 육신은 산야에 뿌려지셔야 했다.
당시 농사만 짓던 시골서 '땅'이 많은 만석군의 딸이라 하더라도 그 땅이 돈으로 환산되는 게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펄벅의 대지'소설 내용마냥 누리는 건 없어도 그저 먹고 사는데 아무 걱정 없이 살았던 내 어머니는 그 젊은 나이에 닥친 시련을 이길만한 내면의 힘을 갖지 못한데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내 아들 잡아먹은 며느리 년''집안의 대를 끊어놓을 년'이라는 멍에를 씌워 어머니께 분플이를 하신 내 친할머니의 닥달에 못이겨 딸 둘을 고스란히 뺏기고 쫓기듯 연고지도 없는 서울에 올라와 공장생활을 하시다 친지분의 중매로 만난...건설 하도급 업체의 사장과 '당신 딸들의 대학비를 대 준다'는 약속만 받고 내 어머니 인생에서 두 번째의 결혼식을 올리셨다.
내 어머니가 피 토하며 내 준 우리 자매...(당시의 상황은 가끔 주섬주섬 어머니가 우리 자매에게 해주는 얘기만으로 짐작이 간다)
그래도 혈육의 정만은 끔찍하던, 없는 집안의 남은 내 아버지 형제들은 형 혹은 오빠의 피가 반쪽씩 흐르는 우리 자매에게 그나마 꽤 정성을 쏟았던 것 같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공주풍의 잠옷이나 하늘거리는 원피스만 거의 입고 다니던 내 어린시절의 기억에 의존해 보면 말이다.
거의 결벽증에 가까울만큼 우리자매의 옷에 묻은 단 하나의 얼룩도 용납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깔끔함과 신문사에 시를 투고할 만큼 낭만적이고 순수한 아버지의 성격이... 그리도 온 가족이 풍비박산 나기 전의 우리 자매에게 어떤 교육적인 환경에 영향을 끼쳤는지는 몰라도 다행스럽게 우리 자매는 어렸을 적 공부 하나는 똑부러지게 잘했고 특히나 내 친언니는 동네에서는 알아주는 영특함을 지니고 있었다.
요즘 내가 읽은 책 중 '자식에게 부모는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책이 있는데...우리 자매의 본보기가 바로 할아버지셨다.
내 유년시절 기억의 최대치를 끌어올려 더듬어보면 늘 우리들의 공부를 옆에서 지켜봐 주셨고 텔레비젼에서 보이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당시로는 이해하기 힘든 나이임에도 우리들에게 항상 설명을 해주셨고 한자공부를 특이하게 100자에 100원씩 주시며 강요없이 용돈벌이로 시키셨고 늘 신문을 끼고 계신 모습에 우리는 항상 그 옆에서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들의 성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질라치면 친척들이 총동원되어 성적표를 앞에 놓고 돌아가며 야단을 쳤기 때문에 가끔 방패막 역할.... 그 특유의 눈 찡긋거리시는 표정을 지으며 몰래 도장을 찍어주셨던 것도 바로 할아버지다.
그래도 내 부모는... 우리에겐 장기를 보호하는 피부의 역할을 하는 거라서 피부가 벗겨져 나간 몸속의 장기들은 어딘가는 탈이 나게 마련이라 그 탈 중 하나가 바로 나이차가 별로 없는 막내삼촌이었다.
자신이 받아야 할 사랑을 조카들이 받고있음을 어렸을 적 부터 질투했었을까....
아니면 그 작은 나이차때문에 항상 비교가 되는 조카와 삼촌이라는 관계가 버거웠을까....
사춘기가 접어들면서 우리들만 싸고도는 할아버지께 반항이 시작되고 급기야 우리들에게 수년간 손찌검을 해다다 나가라며 집밖으로 쫓아내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일반적으로는 푸근하게 다가오는 친할머니의 기억은 나에겐 해당되지 않는 일인 이유도 아직 어린 조카들을 가죽 혁띠로 구타하는 막내의 자행을 알면서도 덮어주고 무마했던 할머니의 미련스러울만치 맹목적인 자식 사랑때문이기도 하다.
너무 아프면 아프다는 말도 못한다고 했던가....
돌이켜 보면 별로 달콤하지 않는 유년시절의 기억임에도 이 정도로 덤덤할 수 있는 건 이렇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건들은 그나마 내 추억에서 별로 아픈 추억이 아니기에 가능할 지 모르겠다.
내 유년시절의 따뜻한 추억에서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나의 할아버지는 아직도 그 긴 기찻집에서 살고 계시고 내 부모의 역할을 조금씩 나누어 해 준 친척들은 이제 각자의 가정에서 그 때의 우리보다 더 큰 아들,딸들을 키우고 있다.
나와 내 언니.....
없는 집안에서 유학까지 마치고 외국인 회사 오너 비서로 근무하며 간간히 전문서적을 번역하고 있는 언니와, 유학 바로 직전 지금의 남편을 만나 사랑에 목숨을 걸었던 나는 정말 치열하게 살다 이미 상처 투성이가 되었음직 하지만, 어렸을 적 수십번도 더 반복해서 읽었던 소공녀 책의 주인공 세에라가 우리라며 키득거릴 수 있게 상상력을 키워준 할아버지가 아직 생존해 계신 건 순전히 먼저 가신 내 아버지가 우리에게 천상에서 주시는 선물이고 축복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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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전이라 아이들을 낮잠까지 재운 후 느즈막히 그 기찻집엘 다녀왔다.
내 유년 시절을 정말 서럽게 보낸 그 집엔 아직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고 계시고 근처에 넓다랗고 다소 호화스런 집을 갖고 있는 막내삼촌은 딸과 함께 매일 그 집 오후를 지키고 있다.
할머니는 얼마 전에.... 이미 검버섯으로 온통 덮힌 얼굴을 내게 가까이 하시며 말씀하신다.
'막내가 저번에 그러더라....그 땐 철이 너무 없어 너희들을 많이 때렸다고....후회한다고......'
그러나 어쩌랴....
그런 서러운 기억 너머로 내 기찻집은 아직도 기억 속에 동화 속 궁전보다 더 평화롭게 그려져 있는 걸...
그리고 나에겐....
자주 못 가는 기찻집을 신기하도록 낯설어하지 않고 편하게 통통거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있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