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와는 뭔가가 다른 삶을 시작하고 싶다.
새로운 각오로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야겠다는 각오가
2004년의 새해가 시작되면서 가슴 속 깊이에서부터 몸부림을 친다.
마침 남편 모임에서 신년 모임을 스키투어로 시작하기로 했다는 공지사항이 있어
어쩌면 내 뜻과 그렇게 시기가 딱 맞아 떨어지는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스키투어'라니...
스키라고는 만져 본 적도 없고 단지 텔레비젼에서만 보아왔는데
스키를 직접 타기로 했대나...
이런...
지금까지 가족여행을 숱하게 다녀봤지만
겨울에 스키장을 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질 않은가...
고작해야 한겨울에 내장산이나 지리산 여행 가서 설경에 취해
감탄사나 연발하고 리프트카를 타고 산 정상에 올라
아무도 발자욱을 남겨 두지 못한 숲 속 골짜기의 눈밭을 감상하는 게 고작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행복하다고 늘 생각해 왔었는데...
어찌됐든간에 신년맞이 여행이라 하니 내겐 의미가 크다할 밖에...
남편 친구들의 배려-그들은 나를 날나리 주부로 여김-로
나는 별 준비물도 없이 남편 차 뒷자석에 느긋하게 푹 파묻혀
주변 경관을 감상하며 목적지로 향했다.
무주리조트 입구에서부터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나는 스키를 즐기는 인구가 이렇게도 많은가에 깜짝 놀랬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런 고급 문화를 즐기고 살았는가에 또 한 번 놀랬다.
5분이면 당도할 거리를 거의 두 시간 가량을 지체하고서야 숙소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아들녀석들만 오후 스키를 탈 수 있도록 보내는데 일인당 오륙만원 이상이 소요된대나...
그럼에도 저렇듯 많은 인파가 스키장으로 몰린단 말인가...
지난 해 경기 침체로 사네 못사네 하는 가족들이 얼마나 많았고
교육비를 몇 달씩이나 납입치 못한 가정이 얼마나 많았는데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은 우리나라 경제완 무관한 사람들이란 말인가...
겨울이라 할지라도 우리 동네는 개나리가 필 정도로 따스하기만한 날씨라
하얀 눈을 구경할 수도 없었는데
이곳은 산등성이 마다 인공 눈으로 뒤덮여 설경을 이루고 있다니...
크지도 않은 나라에서 사는 모양새가 어찌 이다지도 다를 수가 있는가 싶어
밤중에도 스키를 즐기는 산등성이의 인파들을 보며 심사가 별로 편치가 않았다.
앞으로 이박삼일간은 속세와 단절하고 살자며 TV도 끄고 핸펀도 꺼두기로 했다.
모든 걸 잊고 머릿 속을 완전히 비워버리기로 했다.
이 나이 먹어서 스키 잘 못 타다간 골절이라도 되면 큰일이란 핑계로
날이 밝기가 무섭게 설국으로의 겨울산행을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때마침 하얀 눈이 조용히 소담스럽게 예쁘게도 내린다.
해마다 스키장을 찾는다는 한 친구가
몇 년 동안 이렇게 눈까지 내려주는 날씨는 없었다며
올해엔 무척 운이 좋다고 감탄해마지 않는다.
'닭살커플'로 이미 낙인이 찍힌 우리 부부는 서로 손을 꼭 맞잡고
향적봉을 향해 눈속을 헤쳐 나가기로 했다.
마치 만들어 놓은 듯한 눈꽃이 핀 그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숲 위를 한참을 지나
곤돌라를 타고 산꼭대기에 도달하니 영하 5도란다.
우리처럼 추운 눈보라를 마다하지 않고
겨울산행을 즐기는 이들이 꽤 많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남편은 추운 지 손등이 벌개진 것도 아랑곳않고 행여나 마누라 미끄러질새라
내 등산화 위로 아이젠을 장착하느라 가뜩이나 두꺼운 옷으로 불편할텐데
엉거주춤 구부린 자세로 낑낑 대는지라
편안히 서서 발만 디밀고 있는 자신이 괜히 미안하기까지 하다.
하늘에선 쉴 새없이 떡가루 날리듯 눈이 내리고
발 아래 세상은 온통 새하얀 눈꽃으로 장식되어 있으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그림이던가...
아름다운 은세계를 뚫고 남편과 도란도란 얘길 나누며
눈길에 우리의 발자욱을 남기며 산 중턱에 자리한 작은 휴게소에 당도하니
남편은 커피 한 잔 하자고 권한다.
좁고 답답한 실내 보다는 탁 트인 눈밭이 나을 성 싶어
눈이 쌓여 있는 야외의 간이 탁자쪽으로 향했다.
부랴부랴 남편은 눈에 덮여 있어 형체가 불분명한
의자임직한 곳에 앉더니 엉덩이를 살살 부벼 댄다.
윗부분의 눈이 녹아버리자 의자의 형상이 말쑥이 드러났다.
'자~
이제 앉아...'
남편은 내게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본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울 남편 밖엔 할 수 없는 일이야...'
불쑥 마음 속으로부터 낮게 감동의 말이 튀어나왔다.
건너편에 서 있던 아낙이 말없이 미소를 보낸다.
'뭘...이 사람아...
다른 남편들도 모두 눈 털고 쓸고 해 줬을텐데...'
멋적어서 힐끗 그 아낙을 쳐다보며 남편은 말을 막는다.
아니야...당신 밖엔 할 수 없는 행동이지...
그건 몸에 배이지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거든...
기 막힌 절경 속에서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남편의 말없는 사랑과 배려...
올 신년의 시작은 비록 값비싼 스키를 즐기지는 못했지만
아름다운 설국에서 속세를 떠나 우리 부부만의 사랑을 더욱 돈독히 하는
겨울산행이었다는 데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우리 앞으로 정말 돈 많이 벌어야겠다...
그런 후 이런 멋진 곳에서 느긋하게 여가생활도 즐기면서 살 수 있도록 말이야...
우리 아이들만큼은
이런 상류 문화를 수시로 접하며 살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그지이...?
올해에는 제발 경제가 쫙 풀려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이 오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하여 누구나가 여유롭게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향적봉 꼭대기에 내 염원을 담아두고 왔다...
머릿 속도 마음 속도 모처럼 개운하게 비워버린 상태에서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건강과 행복이 늘 함께 해주길
두 손 모아 기원하며 올려다 본 하늘엔 여전히 솜털같은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