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 관심은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교무실과 교실이 있던 건물 사이에 한 그루의 감나무가 있고
뒷교정엔 봄이면 앵두꽃이 사춘기인 우리들처럼 말갛게 웃던 여고시절.
그늘도 없는 운동장을 여름내내 혼자 서서는
가끔씩 호기심에 못이겨 찾아오는 나를 멀끄머니 쳐다보던 해당화꽃도
여고시절의 내 노트의 주인공이었다.
난 그들을 보며 봄을 기다리고 여름을 뛰어 넘고 가을날 순박한 감나무를 올려다 보며
감정이 먼저 앞서는 잡글을 써내려가곤 했다.
그러다가 국문과를 가고 싶다는 꿈도 꾸어서는 안되는 대학을 꿈꾸기도 했다.
가정형편으로 고등학교 학비도 밀리던 내겐
꿈꿔서도 안될 꿈을 꾸다 활달짝 깨어나길 여러번......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회사를 다녔다.
그리고 그때부터 쓰고 싶던 글을 대신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든 편지를 썼다.
처음으로 이성을 호기심 어린 머리로 밤잠을 설치게 한 것도 편지를 통해서였다.
그때 난 글 쓰기의 방법과 글 쓰기의 요령을 꽤 많이 익혔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감정이 먼저 앞서고 가슴이 먼저 울렁이던 유치한 글이였지만
퇴근후에 문방구에 들려서 정성을 다해 고른 편지지에
잉크를 찍어가며 펜촉으로 사각이며 쓴 편지가
나의 글 쓰기의 스승이었고 두터운 작문책이었고 성실한 배움터였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난 뒤 글 쓰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한 건 3년전이다.
가당치 않고 딱딱한 삶을 증오했던 그 해,
등돌려 떠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뒷덜미를 쇠파이프로 때려 패고 싶던 그 해, 그 겨울부터였다.
요즘은 솔직하게 수작부리지 않고 표현해서 글 쓰기가 심드렁해졌다.
이유를 달자면 돈 버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이 수퍼다 보니 잔일부터 큰일까지
해도해도 일이라는 놈들이 끝도없이 나를 고단하게 한다.
두 달전만해도 그다지 손님이 많지 않아서 컴을 켜 놓고 남의 글도 보고 꼬리도 달고
내 글의 초안을 잡아서는 퇴근후 두어시간 정리를 해서 글을 올렸는데
지금은 낮에 컴에 들어갈 시간도 없기도 하고 집에 들어오면 피곤해서 침대에 들러붙어
글 쓰기고 뭐고 나몰라라 하고 대자로 뻗어자기 바빴다.
그러나 쓰고 싶은 이 오지랍을 버리지는 못하려나보다.
얼마전엔 암 환자분이 고향제주에서 가지고 온 귤을 비닐봉지에 담아 가지고 왔었다.
암치료를 위해 매장 근처에 원룸을 얻어 치료를 받고 있던 젊은 총각인데
볼 때마다 불쌍하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젊은 총각 손님은 항상 밝게 매장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편하게 물건을 집고 물건 값을 지불하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혼자 걸어가는 걸 보면서 밥먹을 때도 기도를 안하던 나일론 기독교인인 내가 속으로 기도를 했다.
'제발 우리 매장 음식을 먹고 낫게 해 주세요.'
가슴 저린 이 순간을 글로 써내려 가고 싶었지만 결국은 못써내고 지나가 버렸을 때,
잠을 자면서도 머릿속엔 글을 써야한다는 의무와 책임감 때문에 머릿속이 얼얼했다.
또 직원이 손님으로 가장한 사기꾼에게 당한 사건도 적나라하게 떠벌이고 싶었는데
또 침대에 짝 달라붙어 잠만 잤다.
오늘도 단골 할머니한테 억울한 소리를 들어야 했는데
외상값을 안 갚아 놓고 갚았다고 우기는데
손님은 왕이라는 철칙 때문에 없었던 일로 마무리를 져버려야만 했다.
매장을 하면서 손님을 대할 때 진심어린 마음으로 대할 때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씩은 다음부터는 오지마세요 하고 말하고 싶을 때가 더러더러 있다.
그럴 때는 이런 글귀를 머릿속에 써 넣는다
' 손님은 돈이다.'
난 다시 글을 쓸 것이다.
이곳에 머물다 말 글이라도 글을 쓰면서 고이는 눈물을 말릴 것이고
글을 쓰면서 화를 내야할 일도 한 번 더 쉬었다 갈 것이다.
오늘도 손님으로 인해 저녁을 먹다 말고 구석지에 돌아 앉아 눈물을 흘렸다.
오늘도 꺼져가고 있는 촛불을 대하는 듯 위태롭게 잠들어 있는 아이를 만져 보았다.
그리고 잠을 자려 불을 껐다가 일어나 앉았다.
난 다시 내일이면 버스를 타고 돈벌러 일터로 나갈거다.
"손님은 돈이다."
"손님은 내 글의 주인공이다."